우산처럼 안으로 접혀 들다
유숙자
낮달이 떴어요. 내일이 보름인가? 제법 둥글어요.
방금 헤어진 J가 프리웨이에서 달을 본 모양이다. 커피숍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기에 흰 풍선을 잘 못 본 것 아니냐는 농담으로 응수했다. 눈치 빠른 J는 ‘맞아요. 맞아’ 하며 까르르 넘어갈 듯 웃는다. 그 웃음이 경쾌하다. 외롭다는 하소연 뒤끝, 연전에 남편을 여의고 부쩍 말수가 적었던 터라 우울함이 날아간 것 같아 고마웠다.
근자에 주변에서 고독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이 들어가며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현상이 아닐까? 젊었을 때와 달리 시야가 점점 좁아지기에 만날 사람도 줄고 새로운 사람과 어울리려니 함께 공유할 공감대의 형성이 부족한 탓도 있으리라. 이곳 한국 사람들은 교회 중심으로 모여드는 경우가 허다하나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라 해도 소그룹에서나 가능할까? 함께 꿈꾸고 성장하기란 말 같이 쉽지 않다.
현대인들에게 고독과 우울, 외로움은 가슴 열 수 있는 상대를 만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일수록 마음이 우산처럼 안으로 접혀 있음을 본다. 닫힌 마음, 사랑의 결핍 증세가 외로움을 낳는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속성은 내가 다가가기보다 상대가 다가와 주었으면 한다. 내 하소연은 끝없이 풀어내고 싶고 상대는 고개를 주억이며 그냥 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얼마 전 남편이 근무하는 칼리지에서 84세 여자 직원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금요일까지 일하고 멀쩡히 퇴근했는데 토요일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녀는 겉보기에 건강했고 성품이 밝았다고 한다.
Memorial Service에 참석해 보니 삼 남매의 자손과 손자 손녀들이 번성한 다복한 어머니 할머니였다. 다만 자손들이 타 주에 살고 있어 1년에 한두 번 정도 방문했다. 그녀는 20여 년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지금까지 일에 매달려 살아왔다. 사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따금 딸 같은 동료에게 집에 혼자 있을 때 가장 힘들다고 하소연 하더란다. 84세, 죽음 직전까지 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 외로워서였다. 고령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자손이 없어 혼자 외롭게 살다가 쓸쓸하게 떠났다.
100세 시대란 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100세를 살려면 건강해야 하고, 부부가 함께 해로 해야 좋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중에 한 가지라도 빠지면 100세는 고역이다. 임의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나 주변에서 좀 아쉽다 할 때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전에 한국에서는 보통 3대가 한집에 살았고 4대 가족도 있었다. 당시는 으레 어른을 모시고 사는 삶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져 노인이 되어도 외롭지 않았다. 지금은 독신으로 사는 사람도 많고 부모 모시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나이 들면 외로워지기 마련이다.
기실 표현하지 않아 그렇지 이 시대를 살면서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이들이 어릴 때는 외로울 사이도 없겠지만 다 자라 대학으로 떠나고 출가하고 나면 부부만 남고 외로움은 오롯이 내 차지가 되지 않던가. 때로 내가 외로울 때 함께 사는 사람만이라도 다독여 주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헛된 바람이고 꿈이라는 말들을 한다. 기대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가 있는데 하물며 상대가 알아주겠느냐고. 부부가 오래 살다 보면 눈빛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데 그것도 부부 나름일 것 같다.
이 넓은 땅에서는 자녀들이 멀리 살아 자주 보기 어렵다. 다행스럽게도 내 주변에는 마음 맞는 지인들이 있어 속 트며 밥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진실하고 정결한 분들. 나를 맡겨도 좋을 만큼 믿을 수 있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분들. 이런 분들로 인해 각박한 세상이 윤택해지고 배려와 여유로 다독이기에 고독이 희석되고 침체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같다.
삶의 궁극적 목표는 자아 완성에 도달하는 것. 연륜과 경험이 가르쳐 준 교훈과 체험으로 내 외로움을 남에게서 찾기보다 내가 그의 외로움의 대상이 되어 준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남지 않을까 하고 바라본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