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이 생명
유숙자
선친께서 생존해 계실 때 가장 많이 들려주셨던 말씀이 정직에 관해서였다. 우리 집 거실에는 선친께서 직접 쓰신 <정직이 생명>이라는 가훈이 걸려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늑대 이야기를 자주 인용하셨고 장성한 후에는 정직했기에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많은 인물, 목숨을 걸고라도 역사를 바로잡았던 사람들의 고사를 예로 드시면서 정직성을 강조하셨다.
선친께서는 1.4 후퇴 이후, 누구보다도 먼저 서울로 들어오실 수 있었다. 그 두어 달 후 우리 가족도 집으로 돌아왔으나 막냇동생이 천연두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극소수만이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던 시절이라 도시가 텅 비었고 사람의 그림자도 보기 어려울 때 의원을 찾기란 여간 일이 아니었다. 세 살 남동생은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발병 1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온 식구가 슬픔 속에 장례문제로 난감해 있을 때 난데없이 수세기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가 어떻게 이 빈 도시에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으나 마치 누군가 우리의 참담한 형편을 알고 보내준 것 같아 고마웠다.
‘뭐 도와 드릴 일이 없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수세기는 전부터 동네를 떠돌며 허드렛일이나 해주고 연명하던 홀아비였다. 인정 많으신 어머니는 수세기가 들를 때마다 음식도 푸짐히 챙겨 주시고 헌 옷가지도 챙겨주셨다. 수세기는 여러 날 굶어 허기지고 옷이 해어져 살이 벌쭉 벌쭉 드러날 때쯤이면 우리 집을 찾아오곤 했다.
수세기는 관을 짜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 집 뒤란에는 송판이 있어 쉽게 관을 짤 수 있었다. 관을 만들다 보니 송판이 모자라 관 뚜껑이 반만 덮였다. 수세기는 선친께, 외딴곳에 있는 목재소가 폭격을 맞아 송판이 길가까지 널브러져 있는데 한 장 주어오겠다고 했다.
그때 선친께서는 ‘내 평생 살아오면서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거늘 보는 이가 없다 해도 엄연히 주인이 있는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집어다가 쓸 수는 없는 일’이라 하셨다. 선친께서는 관뚜껑이 반만 덮여 발이 보이는 관을 누비이불로 정성스럽게 싸매셨다. 동생은 관뚜껑도 제대로 덮지 못하고 수세기의 등에 업혀 남산 어느 양지바른 곳에 그렇게 묻혔다.
영국에 살 때였다. 음반을 사려고 클래식 전문점엘 갔다. 판을 고르던 중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제작사와 연주자,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까지 같은데 각기 다른 정가를 책정해 놓았다. 정가가 낮게 표시된 것은 무슨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여 높게 책정된 것을 골라 들고 직원에게 물었다. 그때 직원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정가가 낮게 책정된 음반은 가격이 오르기 전에 들여온 것이고 높게 책정된 것은 오른 후에 들여온 것이니 낮게 책정된 것으로 가져가세요. 라고 말했다. 오른 가격으로 팔아도 알 사람이 없는데 원가에 대한 일정 금액만 자신들의 소득으로 취하는 그들의 정직성에 머리를 숙였다.
어떤 행사장을 가게 되면 기념품을 받게 될 때가 있다. “한 가족당 한 개입니다.” 해도 어엿이 부부가 한 개씩 들고나오는 것을 본다. 아마 이를 두고 누가 당신은 왜 정직하지 못합니까 한다면 그들은 눈을 크게 뜰 것이다. 아니 이런 것에다가 정직을 운운합니까 하고. 정직이 사소한 것에서부터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가끔 잊을 때가 있는 것 같다.
세태가 혼탁해서인지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신선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산다고 누가 알아주나?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지식은 공부를 많이 하면 얻을 수 있으나 지식을 얻기 이전에 갖추어야 할 덕목이 정직이라고 생각한다. 정직은 남을 의식하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품에서 습관처럼 우러나와야 한다. 정직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고, 정직을 생명으로 여기는 사회가 된다면 비리나 부정, 부조리라는 말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선친께서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신 정직성은 금쪽같은 막내아들 시신에 관뚜껑도 제대로 덮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다. 하늘을 향해 반쯤 열려 있던 관. 세 살배기 동생이 너울너울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는 내 눈에서 피가 펑펑 솟아 가슴을 흥건히 적시었다. 긴 세월을 살아오며 무엇보다도 정직을 염두에 둔 것은 선친의 살아 있는 교훈이 가슴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직을 유난히 강조하셨던 아버지. 정직을 말씀하실 때는 평소의 자애로운 모습은 간곳없던 아버지. 쩌렁쩌렁하게 큰 음성으로 훈시를 내리실 때면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이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가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