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無言歌

유숙자

언제부터 비롯된 버릇인지 몰라도 나는 창가에 앉기를 좋아했다.

이른 아침, 한 잔의 커피를 들고 창가로 가면 탁 트인 하늘이 가슴 깊숙이 들어와 앉는다.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좋다. 음률의 흐름에 마음을 싣는다. 차츰 고조되는 연주, 악기의 독특한 음색이 세분되어 들리고 전체적인 조화에 빠져든다. 같은 음악이라도 들을 때마다 감상과 감동이 다르다. 이것이 음악이 지니는 신비의 마력이다.

바다의 노래, 숲의 속삭임, 바람의 이야기가 들리고 이국의 어느 호젓한 호숫가나 설산을 헤매기도 한다. 음악은 꿈꿀 수 없는 것을 꿈꾸게 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을 이해하게 한다.

리스트의 “사랑의 ”이 파도를 탄다.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이 음악을 집어드는 것은 하루가 꿈처럼 펼쳐지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랑의 꿈’을 처음 들었던 것은 여학교 시절이다. 저녁 늦게 무용 연습을 끝내고 나올 때면 누군가가 그때까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텅 빈 교정은 낙조와 함께 스며드는 어스름 속에 쓸쓸함이 번져 있었다. 열정을 다해 두드리는 음률이 시간을 정지시켰다. 비애가 넘치는 선율이지만 음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살아 있었다. 분위기가 그래서일까 처음 듣는 곡인데도 극적인 감동을 선사해 준다. 가슴을 파고드는 선율이 흐느낌처럼 잠시 허공을 머물다 스러진다. 소리를 삼켜 버린 공간에 아쉬움이 남는다. 정인을 두고 떠날 때처럼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음악을 누군가 들어줘야 할 것 같다. 그림자도 멀어져 가는 교정에서 피곤함에 지쳐 비척이고 있던 내 영혼에 서서히 생기가 감돈다. 단 한 사람의 관객이 되어 마음을 내려놓는다.

 

로맨틱 멜로디 ‘사랑의 꿈’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축축이 젖어 지나간 시절이, 잊힌 가슴의 고동이 되살아난다. 독일의 노인들은 ‘사랑의 꿈’을 들으므로 다시 젊어진다고 표현한다. 그들이 즐겨 찾는 카페에서 누군가 연주하는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눈에 생기가 돈단다. 먼 옛날의 첫사랑을 회상하며 꿈꾸는 눈빛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음악은 사랑하는 연인들이나 황혼기의 노인들에게 설렘을 맛보게 하는 신비한 곡이라 말할 수 있겠다.

 

가장 아름다운 소곡으로 알려진 ‘사랑의 꿈 제3번’은 독일의 혁명 시인 프라이리 그라트(Frailigrath)의 서정시 ‘오, 사랑이여’의 한 편에 곡을 붙인 것이다. 후에 피아노곡으로 편곡되어 가곡과 함께 유명해졌다. 시에 대한 감명과 멜로디에 중점을 두어 시적인 사랑의 진실을 노래한 무언가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곡에 담긴 사랑의 감격은 매우 깊은 인상을 준다. 리스트의 피아노곡은 남성적인 색채가 짙다. 타오를 때는 불꽃처럼 타고, 조용해질 때는 얼음처럼 냉정하다. 그 사이사이 흐르는 감미로운 음률로 마음을 설레게 하고 세인들의 가슴에 애상으로, 추억으로 다가든다.

 

사랑의 꿈’의 원곡은 가곡 고귀한 사랑’, 가장 행복한 죽음, ,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이다. 리스트는 이 3곡의 가곡을 피아노 소품의 장르인 녹턴으로 편곡하여 1850년에 ‘3곡의 녹턴’이라는 타이틀로 내놓았다. 그중에서 3번째 곡만이 ‘사랑의 꿈’이라는 부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원곡인 성악곡은 3 모두 소프라노나 테너를 위해서 작곡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선율이 지극히 서정적이고 아름다운데 이것이 피아노로 재현됨으로 리스트 피아니즘이 표현하는 지순한 아름다움에 빛을 더하게 된다. 고도의 연주 기법이 요구되는 화려한 작품이라 하겠다.

 

몇 년 전, 텔레비전 아트 채널(Arts Channel)에서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아더 루빈스타인’(Artur Ruinstein)의 연주 ‘사랑의 꿈’을 보여 주었다. 주로 음악과 발레를 선보이는 쿠르트 인터내셔널 필름(Kultur International Films)1947년 작품이다. 그는 다소 근엄해 보이는 얼굴을 약간 치켜들고 시선을 지긋이 아래로 고정한 채 고요를 캐어내듯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 중 동이라 할까. 조용히 흐르는 음률. 마치 꿈속에서 헤매는 듯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 그의 표정은 이미 한 마리 새가 되어 건반 위에서 날고 있다. 중반부를 지나며 손등에 불끈 솟아오른 힘줄 만큼이나 활기찬 연주가 계속된다. 몸놀림이 갈대의 몸짓처럼 흔들리고 있다. 60세의 노인답지 않게 열정이 넘쳐났다. 이제까지 지내온 삶의 굴곡. 비바람 치는 계곡과 능선을 지나며 넓은 바다의 일엽편주 되어 파도와 풍랑과 맞서 싸우는 듯한 격정적인 연주였다. 이윽고 하반부로 접어들며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안온함이 잔잔하다. 인생의 황혼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넉넉함, 인생을 달관한 이의 모습에서나 찾을 수 있는 평화로움이 여운처럼 번진다. 그의 연주에 얼마나 깊이 심취되었던지 연주가 끝나자 저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가의 연주는 바로 이런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에서 풀리는 여유로움. 우아한 영국의 장미라는 별명을 지녔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가 그랬고 시대의 고난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피아노의 성녀 클라라 하스킬의 천의무봉 한 연주가 그것이었다. 로맨틱한 연주로 정평 있는 지중해의 바이올리니스트 ‘지노 프랑체스카티’. 16세에 실명했음에도 바흐의 오르간 작품 전곡을 녹음하여 레코드 사상 불멸의 기념비를 세운 파이프 오르간 주자 ‘헬무트 발햐’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그 완벽함에 질려 전율이 인다. 새로운 토스카니니로 알려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 또한 신들린 자의 모습 같지 않던가. 가장 작은 몸놀림으로 거대한 우주를 삼키려는 듯한 폭넓은 연주는 거장이라는 말이 거저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영속하는 기쁨을 누리려 순간을 포착하여 녹화해둔 ‘사랑의 꿈을 다시 한 번 감상하며 짧은 인생과 긴 예술을 실감한다.

, 사랑이여’ 선율의 흐름 따라 다시 한 번 사랑으로 꿈을 엮는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