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춤추는 12월이면

유숙자

    12월 중순, 가까이 지내는 친구 몇 가정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내가 수술을 하고 회복하는 동안 수없이 방문을 요청한 친지들이다. 거동이 불편하고 운동 상태에 있어야 하기에 기실 손님이 오시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내가 처해 있는 형편을 알기에 조촐한 식사와 디저트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방문을 거절했을 때와 달리 반갑고 즐거웠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발레 ‘호두까기 인형’DVD를 걸었다. 1977년도 로열 발레의 작품으로 Mikhail Baryshnikov와 Gelsey Kirkland 가 주역을 맡았다. ‘호두까기 인형’은 수 십 번 봐온 작품이라 해설을 곁들여 감상을 도우니 그들 모두 발레에 푹 빠졌다. 다음에는 ‘지젤’관람을 약속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많은 곳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한다. 독일의 낭만파 작가인 호프만이 쓴 동화를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와 그의 조수인 레프 이바노프가 2막 3장으로 각색해서 대본을 만들었다. 이 안무에 차이콥스키가 곡을 붙였다. 오늘날「호두까기인형」은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원전을 바탕으로 볼쇼이발레, 키로프발레, 뉴욕시티발레, 파리오페라발레,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영국 로열발레가 특색 있게 개정을 거듭한 것이다.  

 

   ‘호두까기 인형’ 초연은 189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였는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거의 잊혀가던 ‘호두까기 인형’은 1944년 크리스마스이브,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 오페라 하우스에서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에 의해 공연되면서 인기를 얻었다. 비수기인 크리스마스이브에 공연하게 된 것은 발레단의 인지도가 워낙 낮아 공연장을 배정받을 수 없었던 탓이다. 이 공연이 예상외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은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로 공연 일정을 잡았다. 이후 런던에서 뉴욕에서 공연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1957년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 CBS TV가 뉴욕시티 발레단의‘호두까기 인형’을 미 전역에 방영하면서 크리스마스에 공연하는 발레로 자리매김 하었다. 요약하면 크리스마스이브에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소녀 클라라가 꿈속에서 왕자로 변한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과자 나라, 눈의 나라로 여행하는 이야기다. 

    영국에서 살 때 유럽의 여러 발레단 공연을 감상했으나 12월에는 언제나 로열 발레의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했다. 스케일이나 테크닉 면에서 타 발레단이 지니지 못하는 특별한 한 수가 있었다. 환상적인 무대 장치가 압권이었고 의상이 차별화되었으며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흥미롭게 발레극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연출도 한몫했다. 

 

    영국을 떠나온 지 30년이 지났으나 뉴스에서나, 영화에서, 내가 즐겨 다니던 거리, 익숙한 장소를 만날 때면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순간마다 행복을 감지하며 살았던 곳. 자연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유적과 유물이 많은 나라. 겨울이면 음산하게 윙윙대며 부는 바람을 타고 금방이라도 고스트가 나타날 것 같은 나라. 그곳에서 나는 꿈꾸듯 살았. 외국 삶이 처음이라 모든 환경과 경험이 새로워 그럴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영국 사람들 삶의 방식이 감탄이요 존경이었다. 정직하고, 친절하며, 시간관념이 철저하고, 부지런했다. 내 삶에서 맛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런던 교외에 자리했던 우리 집은 외국 대사로 나가 있는 외교관 집이었다. 달랑 가방 두 개 챙겨온 형편을 알기라도 하듯 살림을 그대로 두고 간 Furnished House. 자잘한 꽃무늬가 새겨진 은은한 Pastel 색조로 벽지와 커튼, 베딩 앙상블, 헝겊 냅킨까지 품위 있게 갖추어졌다. 벽지는 실크로 코팅되어 더 우아해 보였다. 춤을 추어도 될 만큼 넓은 부엌에는 수납장마다 크고 작은 접시가 가득했다. 식탁 진열장에 장식해 놓은 본차이나 접시와 찻잔과 커트럴리 등. 이 집주인의 취향과 수준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내 신분이 귀족으로 상승한 기분이었다.

 

    1980년이었으니 종이 냅킨조차 사용해 본 적 없고 행주가 익숙한 우리가 레이스가 달린 냅킨에 묵직한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서 식사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는 우리식으로 국과 찌개에 수저를 사용하지만 모처럼 외국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풍습부터 알아야 하겠기에 TV 드라마를 유심히 보며 식사법을 익혔다.

    근동의 집들 거의 100년이 넘 고색창연하고 우리 집 인근에 템스 강이 흐르고 있어 운치를 더. 그곳 서나 가든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도착하고 처음 맞는 겨울, 기온이 50도에서 25도 사이인데 이곳 사람들 말로는 유례없는 추위라 했. 겨울에도 잔디가 살아 있어 푸르른 곳. 그 위에 눈이 내리는 진기한 풍경을 선사했다.

    보일러의 작동이 시원치 않아 전문가를 불렀다. 약속 시각은 정오였. 1145분쯤 낯선 차 한 대가 우리 집 앞에 머물. 12시가 가까워지자 한 청년이 차에서 내렸다.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정각 12시였다.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30대 청년이 서 있다. 차를 대접하며 몸을 녹이게 했다. 12월이라 TV에서 호두까기 인형’이 방영 중이었다. 그는 차를 마시며 친절하게 호두까기 인형’의 스토리를 말해 주었다. 예전에 나도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영국사람의 민도를 엿볼 좋은 기회였다.

 

    일 년 중 가장 생동감 넘치는 계절은 성탄절이 있는 겨울이다. 컬 디 색(Cul-de-sac)에 있었던 우리 집은 거실 전면이 유리여서 길 건넛집과 마주 보고 있다. 영국은 이곳 미국과 달리 집 바깥 치장은 하지 않고 집 안에 성탄 장식을 해놓는다. 어느 집이나 거실의 커을 활짝 젖혀 놓아 정성스럽게 만든 트리와 장식을 볼 수 있다. 저녁 산책 때 창문을 통해 보는 트리의 불빛이 동화의 나라에 들어선 기분.

    크리스마스이브 자정이 가까워져 올 무렵 산타클로스가 여섯 필의 말을 타고 나타나는 곳. 런던의 극장마다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기에 어딜 가나 크고 작은 ‘호두까기 인형’이 장승처럼 서 있다.

    처음 나아가 본 외국. 전통을 중요시하는 왕국. 그곳에 살며 매일매일 꿈꾸듯 살았기에 계절이 춤추는 12월이면 내 마음은 영원한 그리움 템스 강가 그 마을로 길 떠날 채비를 한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