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아름다운 마음
유숙자
가을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오추기가 무르익어 계절에 민감할 나이도 아니련만 옷깃에 스며드는 소슬바람에도 마음이 허기진다. 자연 속에 살아 있는 것들이 살찌고 열매 맺으며 마음이 풍성해지는 이 계절에 나는 뭔가를 잃어버린 듯 허전하고, 끊임없이 잃어가고 있는 듯한 초조함에 시간 속을 서성인다. 여름내 푸른 그늘을 만들어 주던 나뭇잎이 계절의 옷을 입고 하나 둘 떨어진다. 내 인생의 마지막을 저 단풍같이 아름답게 맞을 수 있다면 하는 부질없는 감상에 젖는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나를 흔들어 놓아 보따리를 쌌다. 두고 온 고국의 가을이 그리워 날개를 달았다. 가을 시를 읊조리며, 구르는 낙엽 따라 끝 간 데 없이 꼬불거리는 산길을 걷고 싶고, 홈통을 타고 도르륵 구르며 떨어지는 가을비 소리도 듣고 싶어서. 군밤을 까먹고 싶고, 비원의 잊을 수 없는 빨강 색 단풍을 구경하고 싶어서. 학창 시절에 즐겨 찾던 동학사, 법주사 등의 사찰과 물 색깔이 아주 고와 비교적 자주 갔었던 변산 해수욕장. 이 모두가 그리움의 대상으로 떠올라 끌리듯 떠났다.
두어 달을 머물며 설악에서 제주까지 두루 돌아본 나는 고국의 가을빛과 향기에 취해서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느긋한 마음으로 차를 마시며 슈만의 첼로 협주곡을 듣고 있었다. 유달리 아름다운 2악장을 들을 때마다 한결같은 감상은 기법과 정신이 원숙한 점이다. 깊은 시정을 심오한 첼로에 의해 표현한 음률이 마치 신기의 경지까지 이른다는 생각이 든다. 심신이 피곤할 때면 슈만의 걸작인 첼로 협주곡을 듣는다. 이 선율에서는 바다의 속삭임이 들리고 타는 듯한 노을빛 단풍이 어린다. 긴 여정이 음률을 타고 스크린처럼 내 안에서 다시 펼쳐져 살아 꿈틀거린다.
그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의 크리스틴이었다. 이제 막 7학년이 되어 소녀티가 완연한 크리스틴이 해바라기 작은 꽃 두 송이를 내민다.
‘아줌마 드리려고 학교에서 오다가 샀어요.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제일 먼저 찾아온 예쁜 손님이다.
‘크리스틴 고마워.’
꽃을 받으며 살포시 안아 주었다.
‘왜 아줌마에게 꽃을 주는 건데.’
크리스틴은 머뭇거리다가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아줌마를 다시 보게 된 것이 좋아서요.’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린 나는 크리스틴을 다시 한번 꼭 안아 주었다.
내가 집에 도착한 날 크리스틴의 엄마는 딸이 얼마나 나를 기다렸는가에 대해 말해 주었다. 어느 날은 아줌마가 몸이 아파서 못 오시는 것은 아니냐고 몹시 걱정했다는 말과 함께. 사랑하는 나의 이웃 소녀의 사랑과 관심이 있었기에 건강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었구나, 새삼 가슴이 찡했다.
올해는 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겪는 상황이겠으나 길고 지루한 투병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여름이 저만치 가고 있었다. 회복 기간 동안,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가 새삼 마음에 와 닿았다.
수술실에서 느꼈던 갈등, 인간의 한계에 대한 무력함. 내가 알게 모르게 마음으로 지은 죄가 고통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 같아 두려웠고 마취가 깨어나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남편과 아이들 걱정이 머리에 꽉 차 있어 수술실에 들어가 준비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생애에서 가장 긴 기도를 드린 것 같다.
크리스틴이 우리 집 옆으로 이사 온 것은 한 살 반 때였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던 시기라 온종일 마당을 뛰어다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묻고 또 묻는 것으로 하루해가 졌다.
거실에 있으면 크리스틴의 종알거림이 잘 들렸다. 창 너머로 보이는 그의 재롱은 시간을 정지시켜 놓았다.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크리스틴은 우리 집에서도 귀염둥이였다. 아들만 키워 본 나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아기자기한 맛에 푹 빠졌다.
가끔 내가 몸이 불편해 누워 있으면 정원에서 꽃을 꺾어다 주며 ‘엄마에게는 비밀’ 한다. 앙증맞은 손가락을 입에 대며 귀여운 표정을 지을 때, 예쁜 어린 천사와 이웃하며 지낼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크리스틴은 그 나이에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을 내게 듬뿍 주었다. 예전에 내 아들들에게서 느껴 보지 못했던 아기자기한 사랑을 한 아이로부터 체험하며 행복했다.
언제 저렇게 자랐을까 싶을 정도로 크리스틴은 해바라기를 닮아 갔다. 학년이 올라가며. 만날 기회가 뜸해졌으나 가끔은 그동안 그렸던 그림을 보여 주기도 하고 읽었던 책의 내용을 이야기해주었다. 자신의 감상까지 곁들이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많이 성숙했구나 싶었다.
오늘 크리스틴의 마음속에 있게 된 것이 고마웠다. 수정같이 맑은 이슬로 피어나는 영혼과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을 선물로 받았다.
물처럼 바람처럼 만난 이웃, 어린 천사로 내게 다가온 크리스틴, 늘 배려하는 이웃이 있기에 삶이 정겹고 힘을 얻는다.
‘아줌마를 다시 보게 된 것이 좋아요’
크리스틴의 맑고 고운 음성이 꽃 여울 타고 메아리친다.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