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거던 사랑하는 이여
유숙자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안네 소피 무터가 앙드레 프레빈과 비공개로 결혼식을 했다. 변호사인 남편 데틀레프 분덜리히와 사별한 후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다가 2002년에 무터는 음악의 동지와 둥지를 틀었다. 지노 프랑체스카티 이후,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나는 무터를 꼽는다. 그녀의 음반을 어지간히 사들여서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내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였다. 발레는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였기에 클래식을 대면할 기회가 많아 자연스럽게 흡수된 것 같다. 중학생이었던 1955년 당시, YMCA에서 일주일에 한 번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처음 들었던 음악이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 op. 61이었다.
이 곡을 당대 최고의 연주자인 지노 프랑체스카티의 음반으로 들었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숨이 막힐 것 같았던 흥분으로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감상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 같다. 특히 제2악장이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섬세하고, 조용하면서 종교적 경건함과 장중함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프랑체스카티의 연주는 아름답고 투명한 음색, 뛰어난 기교, 생명력이 넘치는 음악성으로 하이페츠를 능가한다는 평을 들었다.
베토벤이 이곡을 처음 연주했을 때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1844년 요하임이 멘델스존의 지휘로 런던에서 연주하고부터 빛을 보았다. 베토벤이 이 협주곡을 쓴 시대는 그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대로 왕성한 창작력에 의해 예술적 작품이 수없이 만들어졌던 시절이다. 또한, 불멸의 연인이었던 테레제와 교제하던 시절이었다. 베토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이기도 한 이 곡은 당시의 명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클레 멘티를 위해 쓴 걸작이다. 독주악기로서 바이올린은 광대한 구상과 풍요로운 정서로써 찬연히 빛나고 원숙한 수법에 의해 베토벤만의 독특한 열정이 담긴 곡이다.
1960년대에는 클래식 원반이 귀한 시절이라 듣고 싶은 음악이 있을 때마다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을 찾곤 했다. 당시 친구의 삼촌이 이탈리아에서 성악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는데 그분이 나에게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선물해 주었다. 에후디 메뉴인의 연주였다. 친구의 따뜻한 배려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을 준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새 연주자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사들여 들었던 것이 어느덧 한 종류의 음반으로는 가장 많은 20여 장 가까이 모이게 되었다.
오래전 가족 모임이 있던 날, 나는 큰아들에게 구두로 유언을 남긴다고 했다.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말에 긴장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엄마가 죽거든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을 장송곡으로 연주해다오.”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큰아들이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 2악장을 걸어 놓았다. 11분이 지난 후, 3악장으로 접어들려는 순간 아들은 앰프의 볼륨을 높였다. 장중하고 경건하던 2악장의 음악이 3악장으로 바뀌며 갑자기 밝고 활기찬 무곡 풍으로 흘렀다. 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순간적이어서 전곡을 다 아는 사람이라도 제 악장에서 끈기 힘들다.
잠시 후 아들은 측은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점잖게 말했다.
“엄마, 안 되겠어요. 엄마가 영면하고 계시다가 경쾌하게 바뀌는 3악장에 놀라 벌떡 일어나시기라도 한다면 엄마를 애도하던 많은 사람이 쓰러질 거예요. 차라리 페르귄트 조곡 중에서 “오제의 죽음”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요. 예전에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 쓰였던 장송곡이라며,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엄마가 설명해 주셨잖아요. 아무래도 그 음악으로 바꾸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아들은 당장 내가 죽기라도 하는 것같이 심각하게 말해 온 식구들이 집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었다. 우리 가정은 크리스천이니 교회 의식에 따라 은혜롭게 장례예배를 드릴 것이지만 오래도록 내가 좋아하는 곡이기에 해본 말이다.
많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는 모차르트를 사랑했고 차이콥스키, 드뷔시, 브루흐, 쇼팽, 슈베르트 등 수많은 작곡가를 나의 연인으로 만들었다. 몇 년, 몇십 년을 쫓아다니며 몸살 앓아가며 사랑하다가도 실증 나면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내가 배신을 해도 그들은 조금도 섭섭해하지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나의 음악실에는 그들이 산출해 내어 놓은 분신들이 빼곡히 꽂혀 있어 가끔 생각날 때마다 짧게나마 사랑을 나누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만큼은 달랐다. 그는 나의 연인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나보다 키도 작고 가당찮게 큰 머리에 부스스한 머리칼, 성격도 변덕이 심하고 멋대로이고 정갈한 구석은 한 군데도 없는 남자. 그에게 있어 외모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그의 음악을 아는 사람이라면 수긍한다. 사람을 쏘아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초리와 꿋꿋하게 의지를 드러내는 꽉 다문 입, 그의 얼굴에는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강인함이 있다.
모차르트는 자신에게 사사하러 온 17세의 베토벤을 보며 “이제 곧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사람”이라고 예언했다. 괴테는 베토벤을 만난 후 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 “이토록 집중적이고 정력적이며 내면적인 예술가는 본 적이 없소”라고 썼다.
귓병이 심했으나 그의 강인한 정신을 꺽지는 못했다. 듣지 못해 오케스트라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고 독창자를 할 일 없이 만들기도 했다. 수없이 일어나는 잦은 실수를 알고 그가 지휘봉을 타인에게 넘겨주었을 때 어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는 귓병이 더욱 악화하여 글씨를 써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위대한 피아노 소나타 “해머클라비어”와 “장엄미사곡”, “제9향곡”을 작곡했고, 타계하기 8개월 전에 “현악 4중주곡”을 완성했다.
뛰어난 정신은 허약한 육체에 깃든다는 말과 같이 그의 음악은 끊임없이 육체의 고통과 싸우며 만들어졌다. 작곡가에게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평생을 따라다닌 가난과 외부로부터 단절은 그를 몹시 외롭게 만들었다. 인간 세계를 떠나 고독과 고뇌 속에서 환희를 창조하여 불후의 명작을 남기었기에 그에게 “위대한 영혼을 지닌 음악가”란 호칭이 붙는 것이다. 말년에 에르되디 백작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괴로움을 돌파하여 기쁨으로”라는 표현으로 자기완성을 보여 주었다.
신은 베토벤에게 인간 영혼의 심연에서 울려오는 가장 숭고한 소리만을 듣게 하려고 은총처럼 귀를 멀게한 것은 아니었을까. 최악의 상태를 극복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음악을 그에게 선물로 주셨기에 마음속에 간직한 악상을 이 세상에 내어 놓기 전에는 죽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사랑과 관심으로부터 외면당한 고독했던 한평생, 운명을 극복하고 고통마저 승화시킨 승리한 예술가였기에 후세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의 고독과 아픔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