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 소야곡

                                                                                                                유숙자                                                                                                               

   새벽을 가르며 지나가는 기적 소리에 잠이 깼다. 이리저리 뒤척여도 다시 잠이 들지 않는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글렌데일을 관통하는 기찻길이 있는 탓이다. 한밤중 울리는 기적 소리는 꿈결인 양 아득하게 들리나 먼동이 틀 무렵에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 같다.

 

    어린 시절 방학 때면 개성 할아버지 댁엘 갔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면 금방 도시를 벗어난다. 논밭과 평야를 달리고 산기슭을 돌아 굴을 몇 개 통과하면 임진강에 이른다. 그 건너가 개성이. 기차가 기적을 울릴 때면 기관차에서 뿜어내는 증기가 얼마나 멋져 보이든지 산기슭을 돌 때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위험하다고 창문을 내리셨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뭉게구름 같고 설원에 핀 눈꽃 같았다. 그 즐거움은 9살 겨울 방학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6.25전쟁이 일어난 탓이다. 지금도 기적 소리를 들을 때면 유년 시절의 기차가 떠오르고 할아버지 댁인 개성이 따라온다.

 

    기차와 인연이 있는지 서울 살 때도 집 근처에 기찻길이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어디를 내왕했는지 알 수 없으나 동교동에서 합정동 쪽으로 길게 뻗친 기찻길이 있었다. 이따금 해 질 무렵이나 비 오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곳으로 향했다. 함께 걸어 줄 사람 없어도 외롭지 않았다. 기차가 없고 플랫폼이 없어 누군가 올 사람도, 떠나갈 사람도 없건만 쓸쓸하지 않았다.

 

    런던 교외에 살 때, 집에서 1마일 거리에 Sunbury 기차역이 있었다. 나른한 오후 들리는 기적 소리는 오수를 흔들었다. 기적 소리는 멀리서 들려야 운치가 있다. 비 오는 날이나 땅거미가 내릴 무렵 무겁게 들릴 때는 마음이 우울하다.

    깊은 밤 길게 여운을 남기고 떠나는 기적 소리는 서정 소야곡 같다. 어디로 가는 기차일까. 어떤 사연 있는 사람이 밤 기차를 탔을까. 정든 임을 보내야 하는 여인의 흐느낌이 저런 것일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예외 없이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애수(Waterloo Bridge)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가슴 아팠던 이별은 영화 ‘애수’의 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마이라는 연애가 금기인 발레단에서 사랑한 죄로 쫓겨났지만, 곧 결혼할 것이기에 한껏 들떠 있었다.

    결혼 전날 밤, 갑자기 전선으로 떠나게 된 연인 로이의 전화를 받고 절망한다. 26분 후 워털루 브리지에서 기차가 떠난단다. 택시도 잡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가 겨우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로이는 마이라를 기다리다가 출발을 알리는 기적 소리를 듣고서야 마지막으로 기차에 오른다. 마이라는 인파를 헤치고 무작정 기차가 가는 방향으로 달린다. 승강구에 매달려 마이라를 찾는 로이를 겨우 발견했을 때 기차는 멀어져 가고 애타게 부르는 소리만 역사를 맴돈다. 넋을 잃고 기차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마이라가 너무 애처로워 펑펑 울었다. 이 헤어짐은 한 여자의 일생이 영락의 길로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에 신촌역에서 교외선을 타고 나가면 볼만한 곳이 많았다. 지금은 이름조차 잊힌 고장들. 먼 산이 이끼를 덧입듯 푸르스름하게 봄기운이 퍼질 즈음이나 단풍이 물드는 가을,  기차를 타고 한 바퀴 돌 때면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마음을 빼앗겼다. 어릴 적 친구 은이와 주말이면 곧잘 이 짧은 여행을 즐겼다.

    은이와 처음으로 기차를 타던 날, 은이는 아주 오래된 슬픈 가족사를 들려주었다. 은이네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임진강 근처 장단에서 살았다. 은이 고모는 강 건넛마을에 사는 기관사를 사랑했는데 그는 대대로 내려오는 백정 집 아들이었다. 기관사가 임진강을 지날 때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려는 듯 길게 기적을 울렸다.

    할아버지가 만남을 반대하자 고모는 은밀하게 사랑을 키웠다. 그때만 해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집안에서는 은이 고모의 외출을 막았으나 거세게 반항하자 강제로 머리를 자르고 바깥출입을 금했다.

 

    죽음 같은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어 강물이 서서히 풀릴 즈음에야 할아버지는 은이를 딸려 고모의 문밖출입을 허용했다. 이른 봄이라 바람이 차가워도 햇볕은 따뜻했다. 강둑에는 쑥이며 냉이가 앞다투어 얼굴을 내밀었다. 고모는 말을 잃은 체 종일 강둑에 앉아 있었다. 산모퉁이에서 기차가 나타날 때마다 벌떡 일어나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이 행동만이 고모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날도 고모는 은이의 손에 이끌리어 강둑에 나와 앉아 있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건만 핏기없는 고모의 얼굴은 겨울이었다. 한낮이 기울 무렵 고모는 은이를 심부름 보냈다. 은이가 다시 강둑으로 왔을 때 고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몸체를 드러내자 은이 고모는 기차 방향으로 달리다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단다. 근처에서 일하던 농부가 달려왔을 때 은이 고모의 모습은 강물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 고모의 빈방에서 할아버지는 밤새 담배만 피우셨단다. 은이가 일곱 살 때였다.

 

    간이역, 기차, 기적 소리의 이미지는 쓸쓸함이다. 왜 반가운 만남의 장소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일까. 누군가 떠나보내지도, 안타까운 이별을 해본 적도, 기차에 얽힌 슬픈 사연도 없건만 다시 뵐 수 없는 할아버지 댁으로 데려다주던 기차, 은이 고모를 강물에 뛰어들게 한 기차여서일까. 세월은 흐르고 나는 머물러 이역만리 떨어진 외지에서 추억을 길어내고 있다.

    기적 소리가 들린다. 글렌데일을 지나는 기차의 힘찬 외침.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려 길게 길게 기적을 울리며 새벽을 가른다.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