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라는 이름의 발레

 

삶을 돌아보니 은총 아닌 것이 없다는 첫마디로 TEA-TALK-TIME FALL의 문을 연 유숙자 수필가. 곱게 빗어내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와 색색의 줄무늬 셔츠가 훤칠한 키에 잘 어울린다.

 

어머니가 옛날 분으로는 드물게 독서량이 많으셔서 바느질하시며 들려주시던 '숙영낭자전'이나 '장화홍련전' 같은 고전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들려주시던 클래식 음악은 가슴에 꿈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단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셨던 부모님 밑에서 성장할 수 있음이 큰 은혜였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부럽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 수줍음이 많았는데도 학예회 때 무용을 하면 떨지 않고 무대를 골고루 사용하며 예쁘게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어머니께서 6살 계집아이를 무용소에 입소시켰다니 그 시절에 감각이 뛰어 나셨던 분인 것 같다.

 

6.25 전쟁과 혼란기를 겪으며 정식으로 시작한 발레는 차츰 생의 목표로 변하기 시작했단다. 발톱이 곰겨 토슈즈 신기가 고통스러웠어도 무대에 서는 순간, 통증은 사라지고 나비 몸, 새 몸처럼 가벼웠다니. 당시 발레에 대한 인식이나 사회통념이 매우 부족했기에 발레 예술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했는지도 모른다고.

 

발레는 삶의 모든 것이 되었고 살아가며 어떠한 여건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단다. 그렇게 목숨과 견줄만한 발레는 갑작스러운 부친의 타계로 좌절되었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원대하게 품었던 꿈은 꿈으로 머물고 말았다니 그 심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안경을 고쳐 쓰는 유숙자 수필가의 손이 가늘게 흔들린다. 그때의 고통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첫사랑인 발레를 잃고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목울대가 잠기고 가슴이 차올라 몇 밤씩 새우는 방황의 나날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삶이 보이지 않을 때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그때 문학이 손을 내밀었죠. 마치 검은 돌이 껴입은 이끼처럼 본색이 석연치 않은 갈등을 날려 보낼 수 있게 만든 것이 문학이라는 이름의 발레였습니다. '드가'의 발레 속 여인은 단지 그림일 뿐이고 그것을 형상화해 그려가고 있는 내가 거기 있었습니다. 문학은 나를, 한 마리 백조가 아닌 백조를 춤추게 하는 연출가가 되게 했죠. 나는 문학 속에서 백조와 함께 살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눈가가 촉촉해지고 말끝이 흔들렸다. 듣는 우리도 잠시 숨이 멎었다.

 

아아, 황순원의 '소나기’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읽으며 막연한 동경에 머물렀던 작가의 꿈. 어릴 때 음악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접하고 즐겼던 클래식 음악이 자연스레 문학과 연결되어 작품 안에 녹아들었다.

 

유숙자 수필가는 결혼 후 유럽 여러 나라에서 근무하게 된 남편과 오래 떨어져 살았기에 두 아들의 친구 되어 특별한 삶을 살았다. 철이 덜 든 아이처럼 함께 어울려 음악을 들으며, 노을을 보며, 별을 세며 많은 대화를 나누며 쌓은 추억이 훗날 작품을 쓰는데 풍요를 더해 주었단다.

 

유숙자 수필가는 말한다.

< 글을 쓰면서 명확한 신조가 생겼습니다. 처음 내 문학의 원천이 발레와 음악이었다면 지금 내 삶의 지주는 신앙, 인간관계, 음악입니다. 자잘한 일상사에 남다른 느낌과 감동이 많아 항상 메모하는 습관을 지닌 것도 글쓰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죠>

 

그분은 글을 쓸 때 음악을 듣는다. 글에 따라 선정한 음악을 작은 볼륨으로 배경 삼으면 마음이 풍성해지기에.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 혼자 있을 때 자주 촛불을 밝힌다. 촛불은 감정을 순화시키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주기에 비 오는 날 운치를 더해 준단다.

<이제 살아 있음을 황홀하리만치 진하게 느끼며 주어진 모든 여건에 감사하며 순수와 신의와 기쁨에 이르게 하는 미의 완성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이 들수록 인생의 깊이가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함께한 우리는 시작부터 마지막 메시지까지 은혜와 감사를 노래하는 그분으로 인해 저절로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다. 추억이 깃든 사진첩을 돌려보며 함께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추수감사절을 며칠 앞둔 오늘, 푸짐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정통의 추수감사절 성찬을 대접받은 듯한 날이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유숙자 수필가의 <백조의 노래>와 <서나 가든의 촛불>을 다시 꺼내 읽어보아야겠다.


2014년 가을

글쓴이 이현숙 미주 펜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