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밤에 들려줄 이야기
유숙자
뻐꾸기시계
온몸의 솜털이 솟아 고슴도치가 되고 실핏줄 같은 미세한 소리까지도 흡수되는 밤. 고요를 깨고 들리는 뻐꾸기 소리가 두 시를 알린다. 맑고 경쾌한 요들송이 뒤따르며 숲이 열린다. 컴퓨터에, 전화기에, 아이폰에, 마이크로웨이브 오븐까지 눈 닿는 곳마다 시계가 지천이라도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로 남아 있는 뻐꾸기시계를 좋아한다. 오늘처럼 밤이 깊어갈수록 눈빛이 더 초롱해 질 때면 뻐꾸기 소리의 여운따라 그 시절로 돌아간다.
35년 전 취리히, 반호프 스트라세(Bahnhofstrasse) 바이에르(Beyer)에 갔을 때 어디선가 정오를 알리는 뻐꾸기 소리가 넓게 넓게 광장에 울려퍼졌고 요들의 노래가 뒤따랐다. 돔 형식의 높은 시계탑 건물 꼭대기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여섯 쌍의 제법 큰 인형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데 그 일대 많은 관광 인파가 그 광경을 보려고 모여들었다. 대형 뻐꾸기시계는 15분마다 시각을 알리고 요들을 울리며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음악과 춤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은 자동흡입기에 빨려들듯 바이에르 시계점으로 들어갔다. 우리 집 벽에서 청아하게 노래하는 뻐꾸기도 그때 인파를 타고 들어가 모셔왔다.
뻐꾸기시계는 묵직하게 매달린 세 개의 추를 오르내리며 시각을 알리고 30분마다 한 번 울린다. 시간을 알리건 분을 알리건 <목동의 노래>와 <아름다운 베르네>를 번갈아 들려 준다. 뻐꾸기 소리도 신기했지만, 청아한 요들의 노랫소리가 여운을 남겨 숲속 오두막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별 것 아닌 것이 별것이 되어 기분이 맑고 신선했다.
뻐꾸기시계는 추가 정확하게 수직으로 달려 있어야 노래 부르고 운행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위치가 편치 않다고 느끼면 동작 멈춤이다. 윤활유를 바르고 다시 벽에 걸 때마다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뭔가 심사가 틀리면 며칠씩 요지부동이다. 갖은 정성을 기울여 바로 잡아야 행동을 개시하기에 생명 있는 물체 같다. 정확한 위치에 안주해야 의무를 다하는 뻐꾸기시계, 바르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는 뻐꾸기시계가 은연중 우리 삶의 한 수를 보여주는 것 같다.
달빛
밤이 이슥할 때쯤 방으로 들어서면 달빛에 젖어 하얗게 깔린 그리움을 본다. 차마 그 빛 속으로 성큼 발을 내디딜 수 없기에 창가에 앉아 물끄러미 달을 바라본다. 불면의 밤, 그가 들려줄 이야기가 무엇일까.
달은 신비스러운 자태로 중천에 떠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달빛은 매그놀리아 잎에도 조요히 내리고 내 마음의 창에도 무한한 정감을 일으키며 쌓인다. 달무리가 풀리는 듯, 빛의 향기가 퍼지이듯, 달빛이 은총으로 온 누리에 부어지고 있다. 달빛은 우리에게 뽀얀 그리움의 결 고운 미소를 선사하고 은비늘이 잔잔한 밤바다에 진줏빛 꿈을 안긴다. 꽃잎이지는 밤,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그대가 된다.
이런 밤이면 자연인이 되어 자연과 벗하며 사는 피아노의 시인이 그리워진다. 달빛이 방안 가득 물결처럼 출렁이는 밤, 피아니시모로 연주되는 드뷔시의 ‘달빛’을 듣는다. '달에게 바치는 노래'를 띄운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건반의 순례자가 환하게 얼굴을 내민다.
위안
늦은 밤 잠자리에 들며 리스트의 위안 3번, '고독 속의 신의 축복' (Consolation No. 3)을 걸어 놓는다. 이 음악은 나의 자장가이다. 고요가 사위에 가득한 밤. 사랑의 꿈처럼 달콤하고 시정이 흐르기에 수면으로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리스트가 이 곡을 작곡할 당시 러시아의 카롤리에 비트겐슈타인 백작 부인과 마이에르에서 사랑의 도피 중이었다. 교황청은 유부녀인 백작 부인의 이혼을 수락해주지 않았기에 리스트가 36세 되던 해에 만나 가톨릭 신부가 된 54세까지 연인으로 지냈다.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고독을 극복하려 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리스트의 처절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건 어쩌면 위안을 감상하면서 공감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일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여인이기에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으나 안타까운 마음만 지닌 채 살아야 했던 한 음악가 일생에 대한 가녀린 연민이리라.
리스트는 연인의 아픔을 위로하려는 간절한 마음과 감미로운 행복의 감정을 세련된 정취로 표현했는데 위안 3번은 피아노의 신이라는 칭송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리스트의 작품이기에 더욱 감동을 안기는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리스트와 헤어지고 수녀처럼 생활하며 신학 서적 저술에 몰두하다가 리스트 사망 몇 달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뇌와 사랑에 열정을 덧입고 살다가 사랑에 산화한 결정이 '고독 속의 신의 축복'이다.
쇼팽의 녹턴 2번 op 27의 영향을 받은 리스트가 특유의 화려한 연주와 작곡 대신 섬세하고 소박한 면모를 보여준 곡. 쇼팽의 녹턴 풍의 정서를 기품있고 우아한 선율로 표현하여 쇼팽에 비교해 가볍지 않은 선율이 매우 아름답다.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연주 하고 싶어 하는 감성 어린 곡이다.
오래전 Van Cliburn의 연주를 감상했다. 명 작곡가의 연주를 거의 섭렵하다시피 해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유명한 그가 리스트의 위안을 터치하는 순간 완전히 달라졌다. 외로움이 뚝뚝 흐르는 한 영혼이 깊이 모를 고독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선율은 부드럽고 섬세했으나 음악이 그의 내부에서 불꽃처럼 타올라 음악에 부름에 완벽이 호응했다.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물처럼 깊은 소리를 창조하는 예술가, 그가 CIiburn이다.
리스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Daniel Barenboim의 연주도 피아노의 거장이라는 말을 거저 얻은 것이 아닌 노익장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젊은 시절에는 첼로 연주자로 요절한 '재클린 뒤 프레'의 남편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으나 한결같은 열정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여 명지휘자, 명연주자의 자리를 놓치지 않은 세기의 음악가가 되었다.
불면에 시달리던 수많은 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음악과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때론 음률 속에서 절대 고독의 질감과 채색화된 슬픔, 허무의 소나기도 맞아 보지만 살아갈 용기, 위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도 음악의 힘이었다. 음악 속에서 아득하고 애잔한 감상, 아름답다고만 표현하기엔 적절치 않은 전능자에게로 향하는 그 무엇. 이것들은 작곡가가 표현하고 싶은 영혼의 빛깔이었을 것임을 이제는 알 것 같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