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유숙자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 비가 내렸다.

먼 이방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는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서울의 가을비는 겨울을 재촉하는 듯 차가워도 신선해서 좋다. 촉촉이 젖어 있는 도시의 건물 사이로 우산을 받쳐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여유 있어 보인다. 나도 예전에는 저 군중의 한 사람으로 비 오는 거리를 거닐었는데, 그저 비가 좋아서 빗속을 걸어 다녔던 시절이 그립다. 생각해 보면 30여 년의 세월이 사르르 지나갔건만 바로 얼마 전의 일 같음은 흐르는 세월의 빠름 때문이리라.

 

이 찻집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오려면 아직 20여 분쯤 여유가 있다.

몇 년 전 서울 왔을 때 비를 피하려 뛰어들었던 길가 모퉁이 찻집이 '팡세'였다. 홀이 넓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어 차분했다. 또 있다. 잊을 수 없는 추억 속 찻집과 분위기가 비슷하여 서울 올 때마다 들르게 된다.

 

시야가 확 트인 이 층 창가에 앉아 비 오는 거리의 낙엽 빛 가을을 맘껏 호흡한다. 소리 내며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기 좋다. 빗줄기 따라 너울거리는 이파리들의 물결이 파도 같다. 노란 은행잎이 떨어진다. 여린 빗줄기에도 파르르 떨며 한 잎 두 잎 떨어진다.

저 나뭇잎도 푸르고 싱싱했던 여름 한 철이 있었듯이 나도 꿈을 품었던 젊은 시절이 있었지. 계절과 맞물려 가고 있는 지금 엽록소 없는 잎사귀 되어 푸르기만 했던 여름의 회상에 잠긴다. 빗물은 어느새 옷깃에 스며들어 물빛 젖은 소중한 추억의 시간 속으로 나를 이끈다. 마음이 축축이 젖어 든다.

 

비를 보고 있으면 왜 ‘옛’이 그리울까.

먼 기억 속에서 인연 지어졌던 이들이 생각나고, 잊고 지냈던 아픈 추억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이런 날에는 영혼을 파고드는 음악이 어울린다. 소리가 향기로 피어나는 침묵 속에서 영감으로 들리는 파열음. 마음 깊숙이 들어와 이 순간이 그대로 나의 것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그런 음악. 우울한 차이콥스키의 비창 2악장이 실내를 가득히 채운다.

 

창밖 먼 곳에 시선을 둔다. 예전 어느 날처럼 그가 빗속을 뚫고 성큼성큼 걸어와 음악과 빗소리가 이중주를 이루는 이 공간에 불쑥 나타날 것 같다.

'라메르' 찻집은 클래식 음악과 샹송으로 분위기를 더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찻집처럼. 비 오는 날이면 으레 그곳을 찾았고 그런 날이면 더욱 짙어지는 듯한 커피의 향기가 좋았다. 갓 돋아난 들판의 풀 내음 같은 풋감정의 우리. 운명이 가져다준 계시적 영혼이라 여기며 만나면 영원이고 싶은 시간 속에 꿈을 품고 흐르는 빗물이었다. 빗물이 흘러 개울이 되고 강을 만나 바다를 열망했다.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고향 이야기 들려 주기를 좋아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남해 바닷가라 했다. 파도 소리와 물새들의 노래를 자장가로 알고 성장했다고. 밤바다에 서면 물고기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그 울음은 왕자를 사랑하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의 슬픈 사연일 것으로 생각했단다. 밤마다 바다 꿈을 꾸었다는 그에게서 비릿한 바닷냄새가 났다. 장. 콕토의 시가 연상되는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건네며 귀에 대어보라 했다. 정말 파도 소리가 들리듯 했다.

 

삶이 꽃피기 시작하던 인생의 봄. 푸른 하늘만큼 웅대한 꿈을 품고 한곳으로 시선을 모으려 했던 우리는 현실에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혀 가을비가 축복처럼 내리던 날 축복에서 제외된 채 시선을 흩어야 했다.

 

비 오는 날이면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지나간 시절의 아픔이 다시 나를 흔들어 놓고, 그가 즐겨 부르던 <어느 행복한 하루, 천국과 같아라. (Un di felice, etrea)> 싱그럽고 부드러운 음성이 빗소리를 타고 들려와 그리운 가슴 살포시 열린다.

 

“얘,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니. 앞에 서 있는 것도 모르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추억의 한순간을 붙잡고 꿈꾸던 나는 화들짝 놀라 친구를 바라본다. 머리를 두어 번 흔든다. 시간 너머의 상념을 떨구어 내려고, 일상의 나로 돌아오기 위해서.

 

실내에는 여전히 비창이 흐르고 있다.

젊음을 잃어 가는 것에 대한 비애와 운명에 저항할 수 없는 체념, 생의 공허가 흐르는 단조의 음률이 빗소리에 섞인다.

비가 내린다.

내 삶의 짧지 않은 세월 속에서 겪었던 숱한 시행착오, 슬픔, 괴로움, 아픔을 피안 저쪽으로 넘겨 보내기 위해 비는 내리고 있다.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