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로 가는 길
청명한 가을날 아침이다. 9월의 태양은 마지막 열기로 곡식을 여물게 하고 과일들의 단맛을 짙게 한다. 영주로 가는 길은 산과 들이 아침 햇살로 눈이 부신 황금 물결을 이루고 있다. 며칠 전부터 형언할 수 없는 애잔한 서글픔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을 적시고 있다. 아마도 계절 탓이기도 하다.
40대 초에 전혀 연고가 없는 경북 영주에서 남편의 직장 관계로 4년을 살았다. 그때 인천에 있던 선산이 아파트 계발로 이전을 해야 했다. 우리는 깊이 생각도 없이 영주에 오래 살 것 같이 임야를 매입하고 인천에 있던 증조부 묘와 시아버님 묘소를 영주로 이장했다.
직장에서 2시간 거리인 그곳은 산 아래 편편한 사과밭이 딸려 있고 몇 종류의 과실나무도 있었다. 병풍 처럼 둘러싸인 야트막한 야산 안쪽에는 사과농장을 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가족과 떨어져 살고 계셨다.
일 년이 지나고 우리는 사과나무를 베어내고 아담한 집을 지었다. 주말엔 직장에서 내어준 아파트의 동료들과 아이들이 함께 오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온 들녘에 아이들의 고함과 웃음소리로 골짜기가 떠들썩하다. 봄이 되면 커다란 고목에 가지가 늘어지게 보랏빛 자두가 열리고 먼 곳에서도 단맛을 알고 새들이 먼저 날아와 한동안 분주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아이들이나 어른들도 심심한 겨를이 없다. 마당에 연못을 만들고 송사리와 붕어, 올챙이를 잡아 와 넣기도 하고, 남편은 산에 철망을 치고 검은 염소들을 풀어 놓았다.
능금이 익어가는 여름이 되면 풋사과를 따와 한입 물어보고 그 신맛에 얼굴을 찡그리는 아이들을 보고 웃어대기도 한다. 메뚜기와 잠자리를 잡으러 산과 들로 쏘다니던 아이들의 모습과 웃음 소리가 아직도 골짜기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다.
겨울방학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뜸해져 우리 네 식구는 무인도에 남아 있는 듯 창문 밖으로 펼쳐진 눈 덮인 들판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기도 한다.
세 번째의 겨울을 지내고 그다음 봄에 직장 이동으로 그곳을 떠나왔고, 밴쿠버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다.
오늘은 우리들의 추억이 깃든 그곳에 시부모님의 유택을 정리하러 가는 길이다. 묘를 돌봐 주던 관리인도 나이가 들어 몇 년째 힘들어하며 화장하기를 권했다. 그런 일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큰 무게로 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산소가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어른들이 함께 계신 것 같기도 해서 든든했다.
결정하기가 쉽지 않아서일 뿐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하는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묘소 옆에 젊은 날. 남편이 심어 두었던 주목들이 몇 길이 높이 자라 있다. 그 아래가 어쩌면 낯선 곳보다 편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 수목장으로 결정했다.
한 번도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혀보지 않으셨던 마음이 따뜻하고 선하셨던 두 분의 어른.
많은 도움을 주셨던 골짜기의 할아버지도 지금은 집도 사람도 없어지고 그곳은 소 목축장으로 변해 있다.
수목장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영화의 한 장면인 듯 지난 날이 스쳐간다. 순식간에 모든 추억도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몇 번을 뒤돌아 보았다.
연극의 막이 끝나고 검은 커틴이 닫혀버릴 때처럼 한시대의 막이 끝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