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숫가의 작은마을
아침에 눈을 뜨니 낯선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반쯤 뜬 눈으로 한동안 쳐다본다. 회색빛 배경 속에 잔가지가 잘려나간 우듬지기 나무가 사각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다. 이내 이곳이 해발 6.000ft에 있는 그레고리 레이크 주변에 있는 캐빈 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그만 창으로 보이는 짙은 갈색 나무의 이파리는 모두 떨어져 나가고 작은 가지 몇 개와 몸통만 보인다.
한 점의 그림 같은 창밖의 풍경에 동시에 어머니 얼굴이 스쳐 간다. 전혀 예상치 않은 갑작스러운 느낌이다. 며칠 전 구정에 고향 집에서 동생이 보내온 카톡 사진 때문이었을까. 종갓집이어서 늘 북적대던 명절에 아들 둘만 왔다며 어머니의 모습에 온기가 없어 보였다. 3월이 가까워져 오는데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며 전화 속의 목소리마저 서걱거린다. 마치 잔가지와 이파리가 떨어져 나간 겨울나무처럼 쓸쓸해 보였던 것이 마음에 남아 있었던 걸까.
고국의 겨울이 생각나거나 낙엽이 물드는 가을빛을 보고 싶다면 가까운 빅베어에 오르면 조금은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한국의 가을 못지 않게 단풍 빛도 곱고 겨울엔 눈도 제법 쌓인다.
엘에이에서 두 시간을 운전하고 올라왔는데도 먼 곳에 여행하려고 와 있는 기분이다. 새하얀 풍경에 세상의 번잡한 마음은 일시에 사라지고 타임머신을 타고 젊은 날의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레고리 호수의 높은 지대에, 병풍처럼 둘러있는 계곡 사이의 집들은 오히려 안온하다. 호수 주변을 돌며 산책이나 할까 하고 따뜻한 겉옷을 걸치고 집을 나선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산골 마을은 고즈넉하다. 지금쯤 호수 주위는 눈이 쌓여 있어야 하는데 나뭇잎들이 카펫처럼 도로에 깔렸다.
빅 베어 호수와 에로우헤드 호수 주변은 제법 큰 시가를 이루고 있지만.그에 비해 이곳 호숫가 주변은 더 작고 한적하다. 동화 속의 마을처럼 오밀조밀한 작은 가게들이 길을 따라 양쪽으로 들어서 있다. 대부분 문은 아직 열려 있지 않았다. 길목에 있는 커피하우스에 오픈했다는 사인이 눈에 띈다.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 내외가 반갑게 맞이한다. 외국을 넘나들며 큰 사업을 하다, 여행차 이곳에 와 마음을 빼앗겨 정착했다고 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이 한적한 산속에서 작은 카페에 만족하며 늘 여유롭게 웃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올해는 적설량이 많지 않아 스키 타러 오는 사람들도 많지 않고 호수에도 물이 차지 않았다고 그녀의 남편이 말한다.
미국 어느 곳에도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 동네에서는 오래된 토박이 같다. 주문도 하기 전 하얀 거품이 수북한 라떼를 탁자에 내려놓는다. 자주 들리지도 않았는데 카페라테를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있다. 커피 향이 먼저 코끝을 자극한다. 이 집의 커피 맛은 저 아래 도시의 여느 커피 전문점보다 맛이 일품이다.
봄꽃이 풍성한 커다란 화분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듯 입구에 놓여있다. 내 눈이 자주 거기에 머물자 그녀가 웃으며 남편이 밸렌타인데이라고 사 온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 미소와 짙은 핑크빛 꽃잎이 잘 어울린다. 이 집에서만 특별히 맛볼 수 있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산골 이야기를 들으며 산책하려던 마음도 접어둔다.
사바의 모든 근심 걱정은 저 산 아래 희미한 풍경처럼 잠시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