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해를 맞으며
시간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는 계절은 12월과 1월 사이다. 무언가 마지막 시간을 붙잡고 미진한 것들을 끝내야 하는 조바심을 내다가 미처 다하지 못한 체 새해를 맞는다. 막연히 흘러가는 시간을 인간이 임의로 경계를 만들어 이쪽과 저쪽에 의미를 부여한다. 밤과 낮의 반복인 무미건조한 나날에 이벤트를 만들어 특별한 날을 정한다. 보이지 않은 시간에 색깔과 변화를 주어 삶에 활력을 느끼게 한다.
축제의 계절인 시월부터 서서히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몇몇 모임과 문단의 행사에 참석하고 나면 시간은 금방 12월의 끝자락이 성큼 닦아 온다.
추수감사절이나 설날,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리 집안의 큰 행사다. 일거리는 많지만 이런 만남이 좋다. 가족이 이곳에 없는 아들과 딸의 친구들까지도 크고 작은 우리의 행사에 중요한 멤버다. 모임이 있는 날에는 아이들이 집에 도착하기 전 가능한 한 모든 준비를 미리 해 놓으려고 한다. 함께 음식을 만드는 재미도 있지만, 모이는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꽃을 피울 시간이 많아지기를 바라여서다. 지난 일 년 동안에 결혼하여 새사람이 늘고, 아이를 낳아 어른들의 웃음소리도 덩달아 커지니 더욱 왁자지껄한 잔칫집이다.
여러 가족이 모이니 여기저기서 할머니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기 바쁘다. 한국에서 온 조카며느리가 방학을 맞이한 여섯 살, 열한 살짜리 사내애들을 데리고 3개월 예정으로 우리 집에 와 있다. 손녀딸까지 합세해서 아래층에서부터 할머니를 부르며 쿵쿵거리며 뛰어 올라오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이제는 친숙해진 호칭인데도 갑자기 할머니로서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색다른 경험을 한다. 이제는 어떤 방도도 없이 할머니란 또 하나의 타이틀과 늙어짐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자각하며 낙관까지 찍은 기분이다.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결정될 이민을, 늦은 나이에 결단했던 이국 생활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지워진 힘든 나의 날들이 지나갔다. 나의 시간은 어느새 원하든 원치 않든 집안의 가장 연장자 자리에 와 있다나이들어 감에도 느긋하게 사물에 대해서 전보다 더 흥미와 호기심을 가진다면 인생은 더욱 매혹적인 것이 되지 않을까.
이제는 나의 꿈이 아닌 그들의 꿈을 펼쳐 나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 되리라. 우리에게 선물로 준 열매가 단단히 여물어서 단물이 배어들도록 든든한 꽃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새해를 알리는 로즈볼 장미 축제를 위해 길 건너 아래에 지금쯤 많은 자원봉사자가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해마다 1월 1일엔 로즈볼에서 새해를 알리는 축제가 시작된다. 장미로 단장한 수십 대의 꽃차와 마칭 벤드, 기마대들이 퍼레이드를 이루고 하늘에서는 스텔라기가 축하 퍼레이드를 한다. 많은 관중이 운집한 코로나 거리를 지나 유서 깊은 패서디나 올드 타운까지 행차한다. 각지에서 공수되어 온 희귀하고 값비싼 장미와 각종 꽃으로 후원 회사들이나 각 기관에서 태마를 정한다. 로고나 상징이 되는 이미지를 최대한 부각하려고 경쟁한다. 꽃차를 만드는 과정은 테마가 되는 모양을 미리 자리를 만들어 꽃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 시킨다. 그 위에 하나씩 꽃들을 꽂아 완성해 나간다
꽃차가 완성되어 다음 날 아침,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꽃차들을 우리는 전날 미리 보려고 빅토리아 공원으로 간다. 집에서 10분 거리인 로즈 볼 행사를 쉽게 관람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린다.
꽃차가 떠난 몇 시간 뒤 같은 로즈볼 경기장에서 풋볼 경기가 시작한다. 미국 각 대학에서 대형 버스를 타고 온 선수들은 곧 로즈볼 킥오프를 시작 한다. 대학풋볼 가운데 100년이 넘는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경기다.
장미 축제가 끝나면 연말의 모임에 젖어있던 다소 들뜬 마음 자락을 정리한다. 시간의 경계를 또 하나 지나고 서서히 새해가 시작됨을 실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