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다시 가본 그곳
한 무리의 새 떼가 포물선을 그리며 아득히 멀어져 간다. 날아간 새 떼 뒤로 바다와 닮은 하늘이 수평선 끝까지 펼쳐져 바다와 맞닿아 있다. 어느 것이 하늘이고 어느 것이 바다인지 알 수 없다. 방파제 앞의 파도는 온종일 똑같은 리듬으로 우르르 몰려 왔다 밀려 나간다. 20년 전에 왔던 그 모습 그대로 바다는 변함이 없다
어둠이 내리자 바다에 비친 월광은 비밀스럽고 신비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듣는 파도 소리는 무한한 공간에 한낮 초라하고 미약한 존재를 실감하게 한다. 파도가 방파제 위에 있는 집 가까이 밀려온다. 금방이라도 우리의 잠자리를 삼킬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거역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며 낮과 밤의 두 얼굴을 가진 생명체다.
새벽이 되자 어둠 속에 침잠하고 있던 물상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바위에 부딪히는 천둥 같은 소리는 여전한데 간밤에 듣던 공포감은 사라지고 반짝이는 금빛 물결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아침 햇살이 빗살 무늬를 길게 드리우고 있다.
파도 소리도 순해졌다. 모래톱이 데워지기 시작하고 방파제 아래 검은 돌들도 빛이 난다. 중년의 여자가 바위틈에 머리를 묻고 무언가 캐고 있다. 어제 우리에게 댓 마리의 가제를 들고 왔던 근처에 사는 여인이다.
멕시코 샌귄틴(sanqintin). 이곳 바닷가에는 주말이나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엘에이에서 자제를 싣고 와 간단히 지은 네 채의 집이 있다. 일행은 아침 일찍 방파제 아래로 낚시를 나가고 없다. 파도 소리와 가끔 끼룩거리는 새소리 외에는 인기척이 없다.
오늘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볼 참이다. 동네라야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여섯 가구가 전부다. 가끔 찾아오는 이방인들에게 굴이나 조개를 캐어 팔기도 하고 불편한 일이 있으면 도움을 주기도 한다. 수도 시설이 없는 이곳에서, 잠깐씩 머물다 가는 타지인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고 집을 관리해 주는 아저씨의 집에 들렀다.
집은 개방되어 있고 3대가 같이 사는 넓은 터에는 나무와 꽃들도 몇 포기 심겨 있다. 생각보다 안정된 모습이다. 이 황량하고 외딴곳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어쭙잖은 생각은 나의 선입견이었다.
열 살 전후의 대여섯 명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놀다 우르르 달려 나온다. 먼지 묻은 반바지에 맞지 않는 웃옷을 걸치고, 가슴은 훤히 드러내놓고 있다. 낯선 사람에게 ‘홀라’ 하며 인사를 한다. 더러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낯선 이방인을 빤히 쳐다본다. 강아지도 덩달아 꼬리를 흔들며 마중 나온다.
70년대 우리의 시골 풍경이다. 끝없이 넓고 척박한 땅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어른들과 아이들은 구김이 없다. 도시인들이 누리고 사는 온갖 문화시설 없이도 그들은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치열한 경쟁이나 타인과의 비교, 혹은 공동체와 크고 작은 갈등 없이 단순한 삶의 행복을 누리며 산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엔세나다 근처 바닷가에서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다. 비가 오지 않은 황톳길을 달리다 보면 가끔 그 메마른 언덕에도 풀 몇 포기를 키워내고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생명을 본다. 그것들이 귀히 여겨진다.
바닷가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로 먼지가 풀풀 날리고 길은 울퉁불퉁해 차가 요동친다. 땅이 넓어서 인지 모든 국도나 지방도로는 거의 일직선이다. 나무 한 포기 없는 모래벌판을 지나는 동안 인가는 드물게 보인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아래 넓은 공터에 어디에서 모여들었는지 남녀노소가 부활절 축제를 즐기고 있다. 소박한 음식 부스 앞에 노인들이 한 줄로 의자에 앉아 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구경하고 있다. 젊은 남자애들은 또래 여자들을 태우고 허름한 지프를 몰고 모래 언덕을 올라갔다가 구릉지를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개조한듯한 지프차가 언덕을 올라가다 모래밭에 묻혀 헛바퀴만 돌며 모래를 뿌려댄다.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와 모래를 파고 차를 밀어낸다. 공동체 삶의 신선한 풍경이다. 도시화 되기 전 우리의 삶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이 넓은 땅이 불모지처럼 버려져 있는 것은 강우량 때문이다. 7개월 동안은 비가 오지 않은 땅. 3월 부터 11월까지의 강수량이 13밀리밖에 되지 않은 땅이다. 티후하나와 앤시나데에는 넓은 빈 땅에 물을 끌어와 농작물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는 곳도 있다, 물이 풍부하다면 모두 옥토가 될 땅이다.
바다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레고 자유롭지만, 도시로 돌아오는 것은 두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국경 근처에 오니 행상인들이 가정에서 만든 음료나 과일들을 컵에 담아 팔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생존을 위한 기회를 얻기 위해 서성이고 있다. 넘을 수 없는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몇 번의 검문소를 지나 지루하게 통관 절차를 기다려야 한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풍경이지만 그때보다 더 삼엄해졌다.
새들은 자유롭게 국경선을 넘나드는데 사람들은 내편 네편, 네 탕 내 땅 가르며 끝없이 경계를 짖고 반목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