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새가 되어
한국에서 방문 오신 어머니를 모시고 글렌데일 시립공원 안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찾았다. 집에서 15분도 걸리지 않은 그곳을 시간을 내어 꼭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작은 공원 주위로 5월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뒤편으로 시립 도서관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낮은 담 아래 소녀상이 햇볕을 받고 생각에 잠긴 듯 작은 의자에 앉아 있다, 누군가 두고 갔는지 마른 꽃 한가지가 무릎에 놓여 있다. 나도 장미꽃 한 송이를 손 위에 놓은다.
단발머리에 치마저고리.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이국의 공원 한편에 다소곳이 앉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마치 지난 날을 회상이라도 하는 걸까. 평화의 비 옆에는 작은 의자가 놓여 있다. 누군가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 주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로 다시 태어나서 소녀상 어깨 위에 앉아 있다.
어머니는 소녀상이 마치 살아있기라도 하듯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도 당신처럼 하마트면 끌려갔을 텐데 간신히 살아났소.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고생했오 고생했오’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인다.
어머니도 열 일곱 살 무렵 징집의 대상이어서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며칠 동안 겁에 질려 움막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때의 공포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듯해 보인다
글렌데일 소녀상이 세워질 무렵 이곳 일본 커뮤니티의 반발이 심했으나, 가주 한미포럼이 글렌데일 시 정부를 설득해 공공장소에 세워지게 되었다. 해외에서 세워진 첫 번째 소녀상으로 건립 부지를 내어 준 시정부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특히 프렌킨 킨데로 글렌데일 시장의 협조가 있었다고 신문을 통해 알고 있다.건립을 반대한 일본인 중99%가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던 그때의 인터뷰 기사가 인상 깊게 남아있다.
한국에는 지역마다 많은 소녀상이 있고 미주에도 일본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뉴저지를 비롯한 소녀상 건립이 더 늘어날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강제로 징집당한 가장 비참한 성노예의 피해자였다. 우리들의 아픈 역사이며 그들을 대변하는 상징이다. 젊은 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한 평화의 비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권을 유린당한 사실을 잊고 산다면 어느 나라에서 우리를 존중해 줄 것인가, 이런 비극이 이 땅에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일본인들도 독일인처럼 진정으로 지난 과거를 사죄하고 피해를 본 나라들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말살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한, 평화의 소녀상은 계속해서 세워져야 하며 우리 후손에게 알려야 한다. 역사는 미화된다고 있던 일이 없어지지 않는다.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기념비, 오토만 제국의 아르메니안 대학살 기념비가 미국의 여러 도시에 세워져 있는데 상대 국가로부터 철거 소송을 당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일본은 반성은커녕 소녀상 철거를 위한 소송을 또다시 시작했다,
참배를 마치고 공원 벤치에 앉아, 전쟁으로 인한 외가와 친가 쪽의 가족사에 미친 전후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국가는 물론 한 가족과 개인에까지 전쟁은 얼마나 많은 상처와 굴곡진 삶을 살아야 하는지 격어보지 않는 세대들은 아마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편적으로 들었던 가족사를 언젠가 좀 더 자세히 듣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는데 어머니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리를 뜨려다 보니 아까부터 아시아계로 보이는 젊은 한 쌍이 공원으로 들어오자마자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촬영을 하고 있다. 마치 색다른 패션 모델이라도 되는 듯 묵념조차 없이 그 많은 사진을 찍어 어디에 필요한지 궁금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떨칠 수 없는 생각은 힘이 없는 국가는 지금도 끓임 없이 강대국들의 이해충돌의 피해자가 되고 그들로부터 보이지 않은 압박과 간섭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