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날, 슴베에 대하여 / 변종호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은자隱者이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날의 수명이 다하거나 도저히 견뎌낼 수 없으면 속을 내보인다. 묵언 정진하는 수도승처럼 어떤 고통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본질이다.
오래된 증평의 대장간. “땅⸳땅⸳땅” 망치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달아오른 쇠붙이는 불똥을 튀기며 제 형태를 찾아간다. 바라보는 구경꾼이 반가운지 쌓인 호미를 정돈하며 장인이 말했다. “요즘 전원주택과 주말농장 덕분에 이놈들이 다시 팔려요.” 메케한 불내가 가득한 화덕 앞에서 오래된 농기구를 한참 바라보다 아스라한 기억의 문으로 들어섰다.
제초제와 비닐멀칭이 없었던 예전의 농사는 호미와 낫이 상일꾼이었다. 논밭의 잡초는 모두 호미로 제거했 고 보리와 벼 옥수수 등 농작물은 낫으로 베었으며, 나무를 자를 때도 톱을 따라나서야 했다. 강원도 영월의 두메산골, 잔돌이 태반인 산비알 농사는 쟁기 외는 거반 호미가 팔을 걷어야만 했다. 질척이는 무논을 맬 때는 땅에 쉽게 파고들 날이 길고 뾰족한 외호미가, 엄청나게 세를 불리는 바랭이 쇠비름이 쫙 깔린 강냉이밭, 감자밭은 삼각형 모양을 한 양날 호미의 몫이었다.
염소 뿔도 녹인다는 폭염에 강냉이밭을 엎드려 매는 일은 너무 힘들어 도망치고 싶었다. 가슴팍까지 키가 자란 강냉이 이파리가 목을 스치면 칼에 베이듯 생채기가 났고, 그 위로 땀이 흐르면 몹시 따가웠다. 밭매기도 싫은 데다 아프기까지 하니 열댓 살 소갈머리 없는 아이의 골부림 대상은 호미였다. 돌밭에 힘껏 패대기치면 놀란 고양이가 반사 신경으로 튀어 오르듯 호미는 불꽃을 튕기며 날아오르다 밑으로 굴러가곤 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뒤도 안 돌아보던 어머니는 기다란 밭이랑 끝에 엎드려 한 풀이를 하고 있었다. “남편 복 없는 년이 자식 복이 어디 있겠어, 에라, 이 호랭이가 물어갈 놈아” 앞의 대상은 밭매기 싫어 낚싯대 들고 강가로 간 머리 큰 아들에 대한 푸념이요, 후자는 남녘 어딘가에 산다는 아버지를 향했다.
까닭 없이 땅바닥에 서너 번 패대기쳐진 애꿎은 호미도 더는 못 참겠다며, 골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루에서 빠져나온 뽀얀 슴베가 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깜짝 놀라 호미를 땅바닥에 세우고 돌로 자루를 박아보지만, 한번 드넓은 세상을 본 슴베는 자갈밭을 슬쩍 끌어당기면 홀라당 빠져나오곤 했다. 밭매기 싫었던 철없던 아이는 박으면 다시 빠지는 슴베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긴 이랑의 강냉이밭 속으로 숨어든 어머니는 보이지도 않았다.
요즘은 누구든 쉽게 타자의 눈에 잘 띄고 공이 드러나는 일을 서로 하겠다며 나선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받쳐주는 조력자가 있을 때 세상은 원활하게 돌아간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는 낫이나 호미 칼날도 제 모습을 감추고 소임을 다하는 슴베의 도움 없인 무용지물이다. 인간의 삶도 매한가지라는 생각이다. 20여 년 문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봉사하는 슴베로 살아온 게 대부분이요, 단체장인 날이 된 적은 두 번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날은 빛나지만, 날을 떠받치고 흔들리지 않도록 꽉 잡아주는 것은 슴베였다. 하여, 슴베가 굳건하게 박히지 않으면 날은 힘을 받지 못하기에 날이 아무리 예리해도 허공만 긋다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런 연유로 날이 슴베를 무시해도 안 되고 자루의 도움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슴베가 날이나 자루를 가벼이 여겨도 안 된다.
슴베의 생을 깊게 들여다보면, 가장 깊고 단단한 자리는 언제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우리 인생도 들여다보면 때로는 누구나 슴베가 되기도 한다. 가족이나 동료, 혹은 묵묵히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역할을 맡으며, 남이 보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단단히 붙잡고 서야만 했었다. 문득 깨닫는다. 긴 생을 살려면 날로 살아야 할 때가 있고, 슴베로 살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날이 순간을 자르고 나아가는 용기라면, 슴베는 순간을 하나로 이어주는 믿음이 아니던가.
고희를 넘어서보니 알겠다. 반짝이며 나아갈 날과, 흔들림 없이 지탱하는 슴베, 어느 것도 우월하지는 않았다. 겉은 속의 도움으로 존재했고, 속은 겉을 지탱하기도 했다. 이런 조화가 곧 인간의 삶이자 관계였다. 오늘도 빛나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는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눈에 띄지 않아도, 금세 사라져 잊힐지라도, 깊은 안쪽 자리에서 버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고요하고도 위대한 힘을 지닌 슴베의 삶인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