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록을 찾으러 / 박양근

비가 내리는 날에 겨울을 생각한다. 벚꽃이 난분분하게 떨어지고 아까시 향이 휘돌리는 길에 서서 설원을 상상한다. 먹장구름 아래로 빗줄기가 내리꽂히는 여름날에는 뺨을 갈기던 눈보라를 기억한다. 계절은 눈과 비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억과 소망으로 갈라지는 시간임을 매번 깨닫기 때문이다.

겨울의 그곳에는 언제나 눈이 내렸다. 내가 도착한 후 달포가 지나도록 눈은 그치지 않았다. 들판을 가득 채운 겨울눈은 4월이 지나도 녹을 줄을 몰랐다. 푸른 초원과 백설로 뒤덮인 지붕과 가을걷이가 끝난 황색의 옥수수밭은 겨울 수채화를 이루었다.

설국.

그곳을 찾아간 까닭은 눈의 나라여서다.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지 피로가 쌓인 탓인지 몸살까지 났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일 들르던 도서관도 벌써 사흘째 빼먹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이른 새벽에 커튼을 걷었다.

흰색이다. 창으로 바라보던 한적한 시골의 천연색 풍경이 하룻밤 사이에 순백의 결정을 이루었다. 검은색이든 붉은색이든 단색은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는데 백색은 고결하면서도 성스러운 느낌을 전해준다. 신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 흰옷을 입는 까닭은 신성한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백마나 백곰을 신성시하는 이유도 다른 짐승과 달리 흰색의 초연성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백록白鹿인들 그렇지 않을까.

미열을 마다 않고 현관문을 나선다. 바람에 날린 눈가루가 목덜미에 떨어진다. 몸뚱이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내는 사슴처럼 본능적으로 몸을 떤다. 그렇다. 나는 사슴이다. 눈 덮인 곳이면 어디론가 떠나는 사슴이 되고 싶다.

길을 나설 요량으로 계단을 내려다보니 짐승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한눈에 봐도 제법 큰 동물의 발자국이다. 사슴의 발자국이다. 눈 내린 밤이 되면 야생사슴이 동네까지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주민들로부터 들었지만 실제 사슴의 자취를 목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불현듯 다시 떠나고 싶어진다. 며칠 동안 뒹굴었던 무력증을 털어내며 서둘러 나선다. 다른 사람의 발자국으로 지워지기 전에, 다시 내릴지도 모르는 눈발에 파묻히기 전에, 사슴을 찾아야 한다는 까닭 모를 이유를 곱씹어본다. 눈이 내리는 밤을 도와 찾아온 정성. 닫힌 나의 창문을 말갛게 쳐다보았을 긴 시간.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을 원망하며 돌아간 흔적. 오직 사슴만이, 바람과 숲과 눈에게 이야기를 던지고 싶은 나의 소망을 살펴주려 하는지도 모른다.

숲 속으로 들어선다. 자작나무 가지는 희기만 하고 짐승들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이곳 사람들은 눈이 내려도 덤덤한 표정을 짓는다. 흔하면 귀한 것도 모르고 자주 오면 반가운 마음도 사라지는 건지. 성가시고 번거롭다는 변덕을 여기서도 보게 된다. 사슴이 굳이 나의 문으로 다가온 까닭도 그 외로움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차례의 눈이 내리려는지 하늘은 점점 흐려진다. 밝아오던 새벽이 어둑해진다. 어둠 속에서 내리는 눈은 땅마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만히 내린다. 일순간에 대지를 빈틈없이 덮는다. 사랑이란 감정도 내리는 눈과 같은 것.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가슴에서 자라서 다른 감정을 모두 감싸버린다. 미움도 질투도 모두 덮고 감싸고 가려버린다. 그래서 눈을 경이롭게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눈이 사물의 미추를 구분하지 않고 평등하게 가려주듯 사랑도 미움을 넘어선 베풂인 것이다. 백옥처럼 신성한 것이다.

한번도 거닌 적이 없는 평원에 다다랐다. 여름 한철 동안 옥수수가 군마 소리를 내며 푸른 깃발을 드날린 들판이다. 마을은 오래 전에 언덕 너머로 잠겨버렸고 농수를 저장하는 연못만이 뎅그렁 나타난다. 옥수수 그루터기가 발에 밟히는 소리만 들린다. 멀리 서 있는 침엽수가 낮은 구릉 때문에 더욱 높아 보인다. 그래도 눈 속의 사슴은 보이지 않는다.

사슴은 어디로 간 걸까. 제 집으로 찾아간 것인지, 아니면 희디흰 들판에서 나처럼 헤매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눈발이 심하지 않건만 밭과 구릉을 구분하는 울타리가 갑자기 흐려진다. 멀지 않은 숲만 흐릿한 덩어리로 비칠 뿐이다. 눈발 때문일까 하고 눈을 비벼도 여전히 시계는 흐리다. 얼마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사슴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걸어본다. 같은 길이지만 시간이 다르므로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인연의 길이, 세속의 삶이 그러하다.

눈이 쌓인다. 나를 안내하던 사슴 발자국이 끝내 눈 속에 묻혀 버렸다. 더 나갈 수가 없다. 돌아설 수밖에 없다. 설록은 눈 오는 밤에만 만날 수 있는 고결한 짐승인지도 모른다. 찾으려 하면 더욱 멀어지는 백록담의 백록처럼.

마을로 되돌아오려고 다시 숲으로 들어선다. 눈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고개를 들어보니 다람쥐 한 쌍이 아침 산책을 나서는 참이다. 숲에서 비롯된 고요가 숲에서 깨어진다. 이제 마을 사람들이 깨어나면 요란스러운 하루가 되풀이될 것이다.

무심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멀리서부터 나의 발자국이 이어져 있다. 오늘 밤 설록이 나의 발자국을 따라 찾아오기를 기대해본다. 그러나 못난 인간의 발자국이 어찌 신성한 설록의 길잡이가 될 터인가. 설원은 그대로 두어야 할 성역인 것을.

그래도 오늘 밤만은 날이 새도록 등불을 켜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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