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처럼 / 김민숙

 

 

횡단보도를 건너 인도에 발을 올리려던 참이다. 문안하듯 일렬횡대로 늘어선 꽃 무리에 끌려 멈춰 섰다.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곳, 사거리 커피숍 이디야의 건물 벽 아랫단과 보도블록이 만나는 틈에 꽃밭이 생겼다. 탄성과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아직 남아있는 추위에 어깨를 웅크리고 길을 걷던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 꽃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크고 작은 민들레 스물한 송이가 열을 지어 건물 벽 밑단을 노란 꽃무늬 레이스로 장식한 듯 나풀거렸다.

음울한 도시, 건물 벽과 보도블록 틈에 난 숨구멍이다. 번잡한 도로변의 무채색 시멘트벽에 트인 유리문 아래 자리 잡은 생명이 생경하다. 터전 삼을 산이며 들판이 지천인데 어쩌다가 흙 한 줌 만날 수 없는 도심에 날아들었을까. 바람에 떠돌던 홀씨가 더 이상 밀려날 수 없는 건물 벽에 막혀 주저앉았으리. 녹슨 배수관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도로의 먼지를 자양분으로 삼았으리. 답답한 어둠 속에서도 봄기운을 느끼고 급한 마음에 밤새 꽃대를 밀어 올려 세상으로 꽃등을 밝힌 것이다.

민들레 꽃밭이 있는 사거리 보도에 화분 박스 세 개가 나란히 있다. 민들레 꽃밭이 보리밥 양푼에 수저 소리 요란한 두레상이라면 보도 위에 조성한 화분 박스는 정갈한 독상이거나 조손이 함께 받는 겸상쯤 되겠다. 화분 박스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번화한 자리에서 하룻밤 사이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 뚝딱 꽃을 피워내는 신출귀몰한 꽃밭이다. 지난겨울 꽃배추를 품었던 화분 박스에 오늘은 때 이른 노란 팬지가 추위에 웅크리고 있다. 지난봄엔 무리 지은 하얀색 데이지가 도시인의 눈을 맑혔고 여름내 붉은 페튜니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행인의 사랑을 받던 도시의 정원이다.

화분 박스 속의 팬지는 여리다. 온실에서 충분한 햇빛과 영양으로 결핍도, 목마름도 모르고 자라 허우대 좋은 요즘 아이들과 닮았다.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종일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과 소음에 숨이 가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송두리째 뽑혀 폐기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도로 위의 삶을 산다. 급변하는 국제 환경과 정치 경제의 변화, 과학과 정보화시대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이리저리 부침하는 이 시대의 청년을 보는 듯해서 화분 박스 속의 꽃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50년 대생 노년이 민들레 세대였다면 90년 대생 청년은 화분 박스 세대쯤 되겠다.

꽃밭을 만난 지 사흘째였다. 아침 햇살에 낯 씻은 얼굴이 조잘조잘 지난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던 꽃밭이 밤새 폐허가 되었다. 민들레꽃의 목이 모조리 꺾였다. 참담하다. 어떤 손이 꽃 모가지를 부러뜨렸을까. 우연히 만난 민들레 꽃밭에 마음이 설레 집을 나설 때부터 걸음이 급했는데 뭉개진 꽃밭에 종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별을 닮은 꽃이라지만 스스로 빛을 내는 해를 닮은 꽃으로 보여 ‘환희’라고 이름 짓고 싶었다. 환경 적응력이 탁월하여 어디든 뿌리내리고 번식하는 꽃이어서 ‘희망’이라고 노래하고 싶었다.

햇살이 눈부신 아침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눈길은 민들레 꽃밭으로 간다. 빛무리에 이끌려 눈을 크게 뜬다. 다시 밀어 올린 꽃대, 민들레 세 송이가 피었다. 세상을 향해 조심스레 내민 손이다. 작은 얼굴을 활짝 펴서 세상을 밝힌 꽃. 금빛 찬란한 희망을 피우는 야생화, 여리디여린 것들이 이 세상에 맞서고 있다. 기어이 꽃을 피우고 홀씨를 맺고 마는 생명력, 꽃말이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민들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감사다. 그 신성한 솟음이 거룩하다. 올해 사회로 나서는 막내를 여기, 민들레 꽃밭으로 부르고 싶다.

척박한 시멘트 틈에서 일가를 이루고 도란도란 꽃을 피워낸 민들레와 눈 맞추느라 며칠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사회로 나서는 젊은이들이 흙 한 줌 없는 바닥에도 기어이 뿌리내리고 아무리 짓밟혀도 살아나는 민들레처럼 일어서기를 소망한다. 인구는 줄어들고 세계 경제가 이미 경기 하강 국면으로 접어들어 취업의 문이 바늘구멍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우리 동네에 신선 식품을 취급하는 청년창업 가게가 열렸다. 신선하고 질 좋은 식품을 지근거리에서 공급하는 데다 젊은이들이 뿜어내는 활기찬 기운이 더해 온 동네의 활력소가 되었다. 수도 배관에 문제가 생겨 포털에 검색했다가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에서 지원하는 청년창업 업체를 만났다. 전국이 망으로 연결되어 상담 30분 만에 젊은 청년이 집으로 방문하는 기동력을 보인다. 땅속 깊게 뿌리 내려 어떤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민들레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 시대의 청년들이 미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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