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꼬를 트다

 

문 경 희

 

 

빗줄기가 시원스럽다. 오랜 가뭄 끝에 대지를 두드리는 단비다. 파피루스 위를 기는 상형문자처럼 난해한 균열을 제 가슴팍에 새겨 놓고 끊임없이 물을 호소하던 땅이 아닌가. 버석해진 갈급의 시간을 목젖 아래로 눌러 삼키며 땅은 고요히 해원의 의식에 들고 있다.

타닥타닥.

종회무진 자판을 누비며 문장을 만들어 내는 손가락처럼, 비는 대지의 혈점을 짚어 순환의 물꼬를 이어간다. 하늘은 나날이 청명했으나 태양은 나날이 뜨거웠음으로, 땅은 호미날조차 허락지 않는, 단단한 불모의 현장이 되어가던 차다. 그들이 일구어야 하는 삶이 얼마나 고달플지는 생각도 못한 채, 그 메마른 젖줄에 여린 모종을 꽂으며 신바람을 냈던 내 손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흙에 두 발을 맡인 목숨들은 속수무책으로 새들거렸다. 이파리가 노랗게 타들어가는 그들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비록 몇 바가지씩이나마 물의 선심을 쓰느라 나도 굵은 땀방울을 빗물처럼 쏟았다. 그러나 뿌리에 가닿아 부실한 목숨을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던가 보다. 마른 두렁을 타고 성질 급한 녀석들이 하나 둘 삶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하늘이 내리는 물의 은총이 아니면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기우제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습습한 물의 손이 대지의 결박을 풀기 시작한다. 덩달아 뭇 생명들의 육신으로도 피돌기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역도미노처럼 뿌듯이 아랫도리로 힘을 올리는 모종들을 보면, 어느 시인의 포착처럼, 물은 생生과 死의 자물통을 여는 열쇠가 분명한 것 같다.

고추며, 오이며, 가지며, 호박이며…. 모종들의 뒤꿈치가 축축하게 젖어든다. 내내 마른하늘을 애달파하며 '뭐니 뭐니 해도 물비료가 제일인데….' 시던 윗집 할매도 한시름 놓으시겠다. 삶인지, 죽음인지, 시험에 들었던 모종들은 비의 보법에 발맞추며 뚜벅뚜벅 저마다의 생장곡선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꼬꾸라지고 말 것인지, 비로소 존엄한 삶으로 우뚝 설 것인지. 그들에게 선택되어지는 길이 어느 쪽이든, 내게도 비는 얼마간이나마 면피의 명분이 되어 준다. 그들의 생육을 책임질 능력도 없으면서 섣부르게 지갑을 열었던 대가랄까. 그들 애틋한 목숨에게 마중물을 자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배슬배슬 물기를 잃어가는 모습을 앞두고 죄인처럼 송구할 따름이었다.

잔뜩 물먹은 땅은 좀체 손 탈 일 없는 중년 여인의 젖가슴처럼 무방비 상태다. 그 간당간당한 목숨들이 세상에 제 노릇으로 서게 하기 위해 무엇이든 거들어야 한다고 믿었던 나는 땅의 결기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잡초 제거에 나선다. 세상에 허투루 생겨나는 목숨이 있으랴만, 무엇이든 제 쓸모만큼 가치를 인정받는 법. 이 순간 만고에 쓰잘머리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잡풀들을 뽑아내자 모종은 접사를 해놓은 사진처럼 환하게 도드라진다. 긴 장정의 훼방꾼들을 물리쳐주었으니 제 이름껏 자신을 주창하는 일만 남았을 게다. 추적추적, 내 머리 위에도 비는 어김없이 직립으로 내리꽂힌다.

비릿한 물내를 이고 들어와 책상 앞에 앉는다. 시난고난하기로는 사각의 모니터 속 내 글밭도 마찬가지다. 운좋게도, 꽃 피고 새 우는 봄날 분 바르고 색동옷을 입혀 출가시킨 것이 없지는 않지만, 파종일조차 가물가물한 글의 씨앗들이 넘쳐난다. 어렵사리 발아를 한 것도 방치되다시피 하고, 아직 발아의 기미조차 없는 것들마저 수두룩하다. 애초에 농부의 기질을 타고나지 못한 내가 일구고 있는 글밭의 남모르는 참상이다.

"포트에 상토를 반쯤 채우고 물을 흠뻑 주서 깨씨를 서너 알씩 넣는기라. 그 우에다가 다시 상토를 살살 비비 뿌리가매 살째기 덮어주믄 된다. 쉽제?"

내심 참깨 모종을 받아 볼 욕심으로, 얼마 전 창원 할매의 실시간 중계를 귓속에 꼭꼭 눌러 담았다. 팔순 넘은 농사꾼의 비법이니 신뢰감 백배였다. 그러나 결국 창원 할매의 깨씨는 '반도 안 나서 다 엎어 삤다.'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렇듯 농사에는 생각지 못하는 변수가 만만치 않다는 뜻일 게다.

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십여 년의 이력이 무색하게도 편편이 불확실성의 수렁을 허우적거릴 리가 없다. 토질이 일차적인 문제이기는 하나 살아온 날들이 그리 비옥하지 못했으니 어쩌랴. 여태 그러했듯, 99%의 억척으로 한 뼘 두 뼘 글의 영역을 넓혀가는 수밖에. 잡풀처럼 웃자라는 자만과, 하나를 알고도 열을 아는 듯 떠벌리는 허세, 글로 나를 치장하겠다는 욕망의 바이러스가 글의 뿌리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초심의 거름을 아낌없이 동원한다면 부실한 글모도 분발의 힘을 내어줄까. 가차 없이 모종판을 엎어버린 할매처럼, 때로는 양심껏 파농破濃을 선언해야 하는가 싶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글이랑을 지분거리며 시간을 뭉개는 이유는 바라 그 일말의 희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러는 은은하게, 더러는 거칠게 비의 세레나데가 창밖을 연주한다. 글밭 한 번 느긋하게 다독여 보지 못한 채 겨울이 가고 봄이 갔지만, 괘념치 말라는 듯, 비는 척박해진 시간의 고랑 사이에도 촉촉한 여유를 만들어 준다. 잊을 만하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알은체를 해오던 야릇한 부채감도 한 발짝 물려버린다.

귀로 들어온 물의 소리를 응원군 삼아 모니터를 연다. 타닥타닥,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글의 물꼬가 여백의 농토를 적셔간다. 나날이 씨알 좋은 풍작을 기대할 수야 있을까만, 오늘은 거칠어진 흙살을 헤집고 글 한 포기 뿌리를 내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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