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독 / 류영택 

자명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빨리 일어나 밥을 지어야지 마음을 먹어보지만 마음같이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눈까풀이 따갑고 몸도 천근만근이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어떻게 가게를 꾸려가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들지 못하다가 새벽녘이 돼서 잠이 든 모양이다.

나는 주방을 서성였다. 무엇부터 해야 하지? 밤새 생각을 정리해뒀지만 갓 시집온 새댁처럼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나는 쌀을 안치기 위해 바가지를 들고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한쪽 벽에 놓여 있는 쌀독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핏 웃음이 났다. 내가 너무 긴장해서 그런 건가. 늘 그 자리에 놓여 있었건만 눈을 부라리고 쌀독을 찾아야만 했던 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쌀독은 오랫동안 어머니가 썼던 독이다. 아내는 한동안 쌀통을 사용했었다. 쌀독이 있던 자리에 쌀통을 들여놓던 날, 아내는 쌀독을 베란다에 내다 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다 버리고 싶었겠지만, 시어머니가 썼던 물건이라 차마 버릴 수 없어 그렇게 놓아두었던 것이다.

편리한 걸 굳이 없애고 왜 아내는 쌀독을 고집하지? 아내는 손끝으로 살짝만 누르면 일 인분, 이 인분이 쫘르르 쌀이 쏟아져 나오는 쌀통을 버리고 그 자리에 다시 독을 갖다 놓았다. 투박한 쌀독보다 겉모습이 번지러한 쌀통이 못했던 모양이었다.

쌀독 안을 들여다봤다. 독 안에는 작은 쪽박이 들어 있었다. 나는 쪽박을 잡고 바가지에 쌀을 퍼 담았다. 싸그락, 쪽박에 쌀이 담길 때마다 독을 울리는 소리가 텅 빈 가슴을 울렸다. 그 소리는 지난날 어머니의 고단한 한숨소리처럼 들려왔다.

미닫이문이 뿌옇게 밝아올 때면 어머니는 바가지를 들고 골방으로 들어갔다. 식구들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단지 뚜껑을 들어내는 소리가 잠결에 들려왔다. 새벽을 깨우는 소리, '싸그락, 쏴아악' 쪽박에 담긴 쌀이 바가지로 옮겨지는 소리가 골방을 울리고 어둠을 울렸다. 나는 쪽박에 쌀이 담기는 소리만 들어도 쌀독에 쌀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었다.

독 속의 쌀이 줄어들수록 어머니의 손이 깊이 들어가고, 독을 긁어대는 쪽박 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박박, 누룽지를 긁듯 쌀독을 긁어대는 쪽박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올 때쯤 나는 보릿고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리밥이 담긴 그릇을 앞에 둔 형제들은 아버지의 밥상에 놓인 밥그릇을 곁눈질했다.

"퍼떡 밥 안 먹고 뭐하노?"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형제들을 나무랐고,

"어험"

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숱 뚜껑을 여는 순간 기가 막혔다.

죽도 밥도 아니라는 말을 이럴 때 하는 것인가. 밥이 되어있어야 할 밥솥에는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주걱만 닿으면 허물거릴 것 같은, 마치 풀을 쑤다만 것처럼 반죽이 돼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밥을 해보고는 처음으로 밥을 지었다. 밥솥에 물을 부을 때 처음부터 많이 붓고 물을 따라내면서 조절을 했으면 쉬웠을 텐데. 쌀을 부어 넣고 물을 조절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물을 부어놓고 솥뚜껑을 닫으려니 물이 적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보충하고 돌아서면 적은 것 같고.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죽 밥을 만들고 말았다.

한두 끼라면 어떻게 해결을 하겠는데 때마다 밥을 짓기 싫어 솥이 터져나가도록 한 솥 가득 지어놓았으니 버리지 않는 이상 몇날 며칠 동안 밥숟가락을 끼적거려야 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그 많은 밥을 어쩌지. 가게에 출근을 하고서도 죽밥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든 먹긴 먹어야겠는데 속이 매슥거려 그냥은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비빔밥을 해 먹을까. 아니면 흰죽을 해먹을까.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몰래 버릴까. 신문지에 둘둘 말아 아무도 안 볼 때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릴까. 그렇게 하면 남들 눈은 속일지 몰라도 양심이 편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먹을 것을 버리는 건 죄를 짓는 일이 아닌가. 아이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내가 다 먹어 치우자. 비빔밥도 해먹고 흰죽도 끓여먹고 어떻게 해서라도 먹어치우자. 두 녀석에게는 하얀 쌀밥을 해주고 나는 맛없는 밥을 먹어치우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마음이 편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웃다가보니 아버지 생각이 났다.

쪽박으로 쌀독을 박박 긁는 보릿고개가 다가오면 아버지는 늘 밥을 반만 먹고 남겼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밥을 형제들의 밥그릇에 한 숟가락씩 덜어주었다.

가족들은 보리밥 먹는데, 자신만 쌀밥을 먹어야 하는 아버지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지난날 그때처럼 생활이 어려운 건 아니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새삼 알게 됐다. 오죽했으면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하얀 쌀밥을 다 먹지 않고 반을 남겼을까.

하얀 쌀밥을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는 아들과 딸아이의 모습을 그려본다.

두 녀석의 밥숟가락 위에 고등어 한 점을 올려놓는 내 모습도 상상해 본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보다 그게 더 마음 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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