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좋을 때 / 정성화

 

 

왼쪽 눈에 황반변성이 생겨 주기적으로 동네 안과에 다니고 있다. 어느 날 진료를 마친 원장님이 말했다. 의학 전문지에 올라온 통계를 보니 노년의 건강이 잘 유지되는 시기는 대개 75세까지더라며, 눈에 이상이 있다 해도 지금이 좋을 때라고 했다.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그는 “내 발로 걸어서 내가 가고 싶은 데를 갈 수 있으면 좋을 때지요.”라고 했다.

내 발로 걸어서 어디를 간다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체력이 좋은 사람을 보면 마음이 끌린다. 가끔 들르는 식당의 주인은 나와 비슷한 연배인데 매일 새벽 네 시에 나와 혼자 백반 100인분을 준비한다. 큰 들통을 번쩍 들어 옮길 정도로 힘이 세고, 상에 올라온 갖가지 반찬들은 이전에 우리 어머니가 해주던 바로 그 맛이다. 겨우 2인상을 차리면서도 피곤해하는 나와는 많이 다르다. 식당을 꾸려가기가 힘들지 않느냐고 말을 건넸더니, 손님들이 맛있다고 해주어 신이 난다며 웃었다. 그녀의 긍정적인 마음 때문일까. 그녀가 해준 밥을 먹고 오면 내 몸에도 생기가 돈다.

나이가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광고 카피일 뿐, 내 몸은 나이를 제대로 세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이야 어떻게 가려보겠는데 앉았다가 일어날 때 저절로 나오는 소리, “아이구”는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패키지여행을 가면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여행 첫날 숙소에 도착하면 룸 키를 받기 위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데, 그때 나는 우리보다 더 연배가 높은 부부가 있는지 얼른 살핀다. 있으면 살짝 안심이 되고, 없으면 서운하다.

돌이켜보니 친정어머니도 75세부터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해서 십 년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다. 그 나이가 정말 건강 커트라인이라면 이제 십 년도 남지 않았다. 갑자기 쫓기는 기분이 든다. 살아온 대로 살 것인지, 이참에 좀 고쳐가며 살 것인지 고민이 된다.

운동화를 새로 구입해놓고도 한동안 낡은 운동화를 그대로 신고 다닌다. 휴대폰 하나를 바꾸는 데도 반년을 망설인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은 이사나 이별, 이직을 쉽게 하지 못한다. 나의 변화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거기에서 시작되어야겠다.

말에 대한 회한이 많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때 하지 못한 게 후회되기도 하고, ‘그때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도 한다. 그런데 비교해보니 말하지 않아서 한 후회가 더 많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던가.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 내가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를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오해가 생기더라도 그 오해를 풀 시간이 없을지 모르니 말이다.

소소한 행복이라도 자주 느껴보려고 마음먹는다. 지금 행복하게 사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십 년 후에는 행복해지는 법을 아예 잊어버릴지 모른다. 감자 익는 냄새를 맡는 즐거움, 어느 날 오렌지재스민에 핀 하얀 꽃을 보았을 때의 반가움, 갑자기 좋은 글 소재가 떠올랐을 때의 설렘 등, 이런 느낌들도 모이면 행복감이 되지 않을까. 이런 소소한 행복을 평소에 저축해두었다가 혹한의 시간에 조금씩 인출해서 쓸 생각이다.

내가 목표한 바를 이루었다고 해서 순전히 나의 능력과 노력 덕택이라 할 수 있을까. 분명 좋은 인연과 좋은 운도 나를 거들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못 이룰 게 없다.”는 말로 다른 사람을 더 막막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상대방이 답답해 보인다고 해서 함부로 훈수 두는 게 아니었다. 나의 몇 마디로 남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오만이었다.

오랫동안 내게 맞지 않은 완장을 차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일명 ‘해결사’라는 완장이었다. 돈키호테처럼 나서길 좋아하고 허세가 있는 내 기질이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 내 능력으론 어림없는 일이 많았지만,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 전전긍긍했다. 그 바람에 나를 너무 고생시켰다. 이젠 그 완장을 벗고 싶다.

한 농부에 의해 길러진 팥도 삶아보면 익는 속도가 다르듯, 일의 능률이 매번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나는 기대했던 성과가 나오지 않거나 목표했던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 오랫동안 자책했다.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는 강박증,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면 안달이 나는 성향 때문이다. 삶이란 스스로의 속도로 자신의 열매를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현재를 의미하는 present에는 ‘선물’이라는 뜻도 들어있다. 무한한 가능성으로 채워진 현재야말로 신(神)이 우리에게 베푸는 선물이 아닐까. 지금이 가장 젊고 가장 좋을 때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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