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물 비짐밥 / 염정임

 

 

통영이 제 이름을 찾았다. 수십 년 동안 충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통영이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다시 불리게 된 것이다. 부모님의 고향인 그곳은 내 기억의 우물 같은 곳. 어린시절, 방학이 되면 마산에서 배를 타고 외갓집이 있는 통영으로 간다. 초록빛 물결을 가르며 배는 섬들 사이를 지나 꿈결 같은 아득한 시간이 흐른 뒤에 통영 뱃머리에 닻을 내린다.

멀리서 통영항이 보일 때의 가슴 설렘- 이윽고 배는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통통거리던 기관실의 기계 소리도 꺼지고 닻을 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모두들 내릴 준비를 한다. 밧줄이 던져져 부두에 묶여지고 뱃전에서 갑판으로 뛰어내릴 때, 아래를 보면 심연 같은 시퍼런 바닷물이 주던 두려움도 잊을 수 없다.

토영- 그곳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토영 여자들은 유난히 바지런하고, 별스럽고, 말 많고, 살림 잘 하고, 나에겐 이런 이미지로 남아있다.

오래 전, 소녀 시절에 내 사촌 언니는 “페이톤 플레이스 같은 이곳을 떠나고 싶다”며 나에게 편지를 한 적이 있었다. 조그만 도시이기에 누구네 집 숟가락 숫자까지 훤한 그곳에서, 서로가 너무 관심이 많다보니 숨막혀하고 지겨워한다.

그러나 통영 사람들은 어디에서 살던 통영식 음식과 사투리를 버리지 못한다. 통영 여자들은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먼 곳을 마다 않고 수산시장으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살아 뛰는 생선이나 해산물 냄새로 고향바다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것이다.

통영 선창가 한 할머니의 김밥이 충무김밥으로 유명해졌지만, 알려지지 않은 고유의 독특한 음식문화가 발달한 곳이 통영이다. 수군통제사가 있던 곳이라 음식이 화려하고 섬세하다고들 한다. 잔치 때 쓰는 통영식 경단은 일반 경단보다 크기가 작고 속에 팥 앙금을 넣는데, 밖에 입히는 고물의 종류만도 대여섯 가지가 된다. 노란 콩가루, 파란 콩가루, 흑임자, 밤채, 곳감채, 석이버섯- 줄줄이 담아 놓으면 보석 같아 보인다.

잔치나 제사상에 올리는 도미찜은 도미 뱃속에 갖은 야채를 양념하여 소로 넣고 도미 몸채에는 색색의 갖은 고명을 얹어 찐 다음에 식혀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이른 봄에 나는 풋마늘로 담그는 마늘김치도 독특한 풍미로 입맛을 돋운다.

회양적도 유명하다. 꼬챙이에 김치, 파, 홍당무, 등을 양념하여 차례로 끼어서 밀가루와 계란을 입혀 지져내는 일품요리이다.

통영식 굴젓은 어리굴젓과 달리, 굴에 간을 심심하게 하여 발효시킨 다음 무를 얇게 굵어 넣어 고춧가루를 조금 넣고 익힌 것으로 그 새콤한 맛이 독특하다.

특히 요즈음도 우리집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 해먹는 비집밥(비빔밥)은 도시생할에 지친 몸에 활력을 준다. 우선 너물(나물)을 여러 가지 볶는다. 호박, 시금치, 숙주, 고사리, 도라지, 가지 등 보통 여섯, 일곱 가지로 만든다. 특히 겨울철에는 생미역이 들어가야 제대로 맛이 난다. 바지락조개를 다져서 뽁아 나물에 넣는 것도 특징이다.

통영식 말법대로 하자면 조개를 다글다글 볶아 넣고, 국물을 자작하게 부어 너물을 만드는 것이다. 식구들이 많이 모일 때면 다른 반찬이 없어도 큰 양푼에 쓱쓱 비벼서 나누어 먹는다. 입안에서 고소하게 퍼지는 참기름 냄새와 가지가지 야채의 고유한 맛, 그리고 해산물의 향기가 부드러운 밥과 어우러져서 미각을 감싸는 것이다. 그 맛은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리게 하고, 고향의 흙과 바다를 품에 안은 듯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을 준다.

사소한 일로 서먹서먹해진 시누이와 올케 사이도 이렇게 한 그릇의 비빔밥을 나누어 먹고 나면 지난 일은 다 잊고 마주보며 웃게 되고, 시댁과의 갈등으로 마음이 무겁던 딸도 친정집에서 먹는 고향 음식으로 입맛을 되찾고 힘을 얻는 것이다.

이제는 내 아이들도 비짐밥을 좋아하니, 고향의 맛은 이와 같이 계승되는 것인가 보다

일본의 한 시인은 고향이 그리울 때면 기차역에 가서 고향으로 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나는 고향의 음식을 해먹으면서 멀리 있는 고향바다와 아득하게 흘러간 유년의 세월을 더듬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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