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무르익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뜨락도 생동의 기운으로 왁자지껄하다. 이 소란한 와중에도 은행나무 위에 드러누운 등나무는 끝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쯤이면 벌써 새잎을 내고 꽃봉오리를 맺어야 하는 시기지만, 말라비틀어진 줄기에 푸른 기운이 돌아올 기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한때 등과 은행나무는 서로 사이좋은 이웃이었다. 등나무가 허리를 펴고 싶다고 하소연하면 은행나무는 서슴없이 제 가지를 내뻗어 줄기 끝을 붙잡아 주었다. 어떤 날은 까치발로 담장 너머 바깥세상도 보여주고 목말을 태워 장난스레 흔들어 주기도 했다. 이에 질세라 등나무는 가지에다 주렁주렁 꽃단장을 해주거나 벌·나비를 불러서 봄 놀이를 함께 하며 즐거워했다.
둘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등나무가 욕심을 부리면서부터였다. 그냥 쉼터나 곁가지 정도에 자리 잡은 것으로 만족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 날부터 슬금슬금 우듬지 쪽으로 접근하더니 본격적으로 나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무 이파리가 받아야 할 햇볕으로 제 배를 채운 등나무 줄기는 결국 정상까지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지난여름 꼭대기에 높다랗게 걸터앉아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거들먹거리던 서슬은 천하에 당할 자가 없어 보였다. 위세에 눌린 은행나무는 기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비실비실 말라 들어만 갔다. 그 얄미운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관리실 직원이 제법 굵직하게 자란 둥치를 그만 톱으로 싹둑 썰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기에 웬만큼 할 것이지.
정자 지붕 위에 넝쿨이 겹겹으로 엉켜 있었던 등나무는 나에게도 나름대로 소중한 존재였다. 새순이 애초롬하게 돋아 나오면 내 마음도 같이 연둣빛으로 설렜다. 꽃향기 흩어지는 창가에 기대어서 봄 흥취에 젖기도 하고, 쉼터 그늘에 앉아서 더위를 삭이기도 했다. 무서리가 내려앉을 즈음에는 노릇한 단풍으로 왔다가, 우수수 낙엽의 가랑비가 되어 더불어 가을치레를 하고는 했다.
함박눈이 펄펄 쏟아져 세상을 덮어버리면 지붕 위에 흩어진 씨앗을 찾으러 온갖 새들이 찾아온다. 덤불이 뒤엉켜 몸을 숨기기도 쉬울뿐더러 겸사로 먹이까지 있으니 그들에게는 좋은 놀이터가 되는 셈이다. 덕분에 내가 창가에 매달아 놓은 모이통까지 서슴없이 다가와 놀다 가기도 한다. 그런 등나무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려 나로서는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다. 되살아날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혹여 새잎이라도 돋았는지 자꾸만 돌아다본다. 그러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말라비틀어진 줄기를 바라보며 '바보 같은 놈'이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사실 죽은 등나무로서는 억울한 면이 없지도 않다. 무심결에 타고 오른 곳이 하필이면 사람들이 아끼는 은행나무였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이다. 커다란 원줄기는 지붕에 둔 채 겨우 가지 몇 가닥이 건너갔을 뿐인데 나무는 너무 맥없이 무너져버린 탓도 있다. 등나무는 혼자 일어서지 못한다. 반드시 무엇인가에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붙잡고 오르려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한번 잡은 물체는 몸통으로 빙빙 꼬아 돌며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 한다. 타고난 천성이 그런 것을, 까짓 나무를 조금 괴롭혔기로서니 밑동째 썰어버린 것은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가 말이다. 사람들은 어디든 악착같이 얽혀드는 등나무의 성질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갈등葛藤이라는 단어도 이런 못된 성깔머리를 비꼬아서 자기들이 붙여준 말이 아니었던가.
파랗게 새순이 돋은 은행나무는 이제야 숨통이 트인 것인지 '바르르' 흔들어대는 환희의 손짓이 싱그럽다. 여전히 등나무 줄기는 너부러진 채 나무 위에 걸쳐 있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둘의 처지가 꼭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아 보인다. 사람 사는 사회도 등나무처럼 얽히고설켜 서로 경쟁하는 곳이다. 나 역시 불안한 현실을 핑계 삼아 위로만 솟으려 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지 않는가. 갈림길 앞에 서면 배려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거리낌 없이 먼저 손을 내민다. 이 이기적 행위의 결과는 언제든지 의외의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오로지 제 살 길만 찾아가다 비극을 맞은 저 등나무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이 좋아 사이좋은 이웃이었지 사실 베푸는 쪽은 늘 은행나무였다. 때늦은 일이지만 등나무에 염치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제 처지를 알고 좋은 이웃이 있음에 고마워했더라면, 이리 흉한 몰골 대신 지금쯤 화사한 봄 노래를 같이 흥얼거리고 있을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