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철도 지난 지 한참이다. 늦봄인데, 예제서 떨어진 꽃들이 사뭇 마음에 밟힌다. 민주주의 꽃이라는 선거도 끝이 났다. 거리 곳곳엔 각종 후보자들의 명함과 플래카드가 아직도 땅바닥에선 나뒹굴고 허공에선 바람에 나부낀다. 당선자의 사무실엔 축하 꽃들이 넘쳐나겠지만 낙선자의 사무실엔 낙화처럼 쓸쓸함만 감돌겠다.
선거 날 늦은 밤, 개표가 거의 마무리되면서 당선이 확실해진 후보들은 목에 꽃을 두르고 카메라 앞에서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린다. 그 옆에는 당선자 부인도 천하에 행복한 표정으로 환한 얼굴이다. 당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역의 봉사자가 될 것, 국민을 섬기는 머슴이 될 것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다음날 인사차 나온 당선자들은 거리를 돌며 확성기로 감사 인사를 올리고 플래카드에다, 또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한데 오만과 독선 때문이었을까. 시대의 선택적 운명 때문이었을까. 이번 선거에선 뜻밖에 유력 인사들이 줄줄이 낙선했다. 스스로 당선을 장담하며 여유를 부리던 이들이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 셈이다. 하긴 다들 제가 제일 낫다고 외치는 것을 유권자들은 이제 듣는 것도 신물이 났을 테다. 지역 발전의 희생과 봉사, 민의 전달과 지역 숙원사업을 해결하겠다며 목청을 돋우던 처음과는 달리 결국 자신의 신분 상승과 권력욕에 젖다 보니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은 것일 게다. 아무리 좋은 꽃도 자주 보면 물리거나 싫증이 나듯이 처음엔 신선한 인물이더라도 조금 지나면 정치판의 때가 묻고 사적인 욕심을 거르지 못해 권력의 허방에 발목을 들이밀지 않던가.
나무 또한 사시사철 꽃만 달고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밋밋하고 지루할 것인가. 때맞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뒤 열매를 맺고 잎을 떨어뜨리는 것이 나무의 일생이 아닌가. 계절이 바뀌면 새 순이 나오고 새 꽃이 피며 열매를 맺은 후 시들어가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과 어찌 다르랴. 사람의 일생도 마찬가지, 물러 날 때를 스스로 알아 순순히 내려앉아 사라지는 것이 아름다운 순응이다. 자연의 섭리를 피하거나 거절하면 추함만 더할 뿐이다.
예전 어느 국회의원 후보자의 딸이 했다는 말이다. '우리 아버지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하고 낙선하면 우리 집이 망한다.'가 세간에 회자된 바가 있다.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낙선보다는 당선을 잡으려는 이들이 한두 사람이었던가. 선거를 치른 지가 며칠이 지났다고 벌써부터 사정기관에서는 선거 부정사범 색출에 바쁘다. 당선 축하 인사 받기에 여념이 없을 텐데, 정치자금법에 걸려 재판에 넘겨지거나 구속될 처지에 있는 이들의 이름도 언론에 오르내린다.
개화는 꽃이 핌이고 낙화는 꽃이 시들어 떨어짐이다. 이는 자연의 섭리이자 질서이기에 누구도 부정하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앞당겨 꽃을 피우려고 발버둥치거나 꽃이 질 때 아등바등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순응하며 받아들일 뿐이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이형기의 '낙화'에서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밖에 성근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조지훈의 '낙화'에서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성숙을 위한 결별, 삶의 무상과 비애, 슬픔의 승화. 어느 것이 내 마음을 눌러 짚고 가는 것일까. 꽃이 지면 다시 봄을 기다리듯이 낙선한 이들도 부지런히 여름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꽃피울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인간 삶은 결국 기다림이다. 어찌 낙선자뿐이랴. 꿈과 소망을 놓친 이들이여, 꽃들에게 배우시라. 웃음 속에 슬픔이 자라고 울음 속에 기쁨이 잉태한다. 꽃들이 다시 봄을 기약하듯이 그대들도 그동안 희망을 위해 가슴을 익히며 발품을 파시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꽃 진 자리를 짯짯이 눈여겨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