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중입니다 / 남태희

 

 

오늘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 자정을 넘겨 방에 들어갔지만 못 버티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어두워진 거리를 무연히 바라보다 소파에 누웠으나 폭이 좁아 불편한지 마음이 불편한지 이리저리 뒤척이다 앓는 소리를 내었다. 짜증이 가득 배인 신음에 부엌 한구석의 녀석이 감응한다. 우우~ 그렇게 한참을 울다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적막한 밤, 깨어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늦은 밤의 샤워 소리, 도로를 달리는 오토바이 소리, 쓰레기차의 수거 소리, 때를 잊은 도시의 닭 울음소리다. 가장 크게 들리는 것은 자신의 뒤척이는 소리와 녀석의 소리다. 녀석은 밤이면 더 자주 울었다. 마치 제 안의 소리로 잠들지 못하는 주인을 위로하듯이 가늘고 길게 목울음을 울었다.

녀석의 몸은 거대하다. 신혼 초 신부를 닮아 목련 꽃처럼 수줍던 녀석은 새댁의 배가 불러오고 아이들이 자라기 시작하자 덩달아 몸을 불리기 시작했다. 목련 빛이었던 몸체는 대리석마냥 회색빛으로 변해서 아픈 데 없이 십여 년을 함께 했다. 주인은 권태기와 겹쳤는지 지겨움에 다른 집에 훌쩍 입양 보내버리고 다시 상앗빛 화사한 정장을 입은 매끈한 놈으로 바꾸었다. 다시 십여 년, 겉치레만 요란한 게 썩 맘에 들지는 않았던지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도시적인 느낌의 메탈 옷을 차려입은 녀석을 모셔왔다.

녀석은 대식가이다. 입이 하나였던 것과 두 개였던 녀석과 세 개였던 녀석을 다 만나봤지만 네 개의 입을 가졌으니 오죽하랴. 주인이 사다 놓기만 하면 입을 활짝 벌리고서 무엇이라도 한입에 소화를 시키니 어지간한 장보기로는 표도 나지 않는다. 가끔은 미식가처럼 때로는 포식자처럼 어쩌다 포악한 사냥꾼처럼 동굴 같은 네 개의 입을 벌리고 무엇이든 빨아 당기는 모습이 빠져나올 수 없는 욕망의 크레바스와 같다.

녀석은 잡식성이라 못 먹는 게 없다. 소고기는 물론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고등어, 조기에 양미리, 새우는 물론 뻘밭 식재료도 섭렵한다. 매생이는 물론 각종 조개류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먹어치운다. 김치는 물론 깍두기 국물까지 마셔대더니 이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폼 나게 마신다. 그것뿐이랴 각종 양념장에 생수까지 다람쥐처럼 입 안쪽에 물고 있는 것만 하여도 스무 가지가 넘지 싶다. 딱히 잘하는 것 없이 이것저것 변죽만 울리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볼썽사납기는 마찬가지다.

녀석은 가끔 폭군이 된다. 차가운 가슴을 가진 녀석은 가끔 심술을 부려 주인의 행동이 조심스럽지 못하거나 곰살맞지 않을 때, 무시로 흉기를 휘두른다. 흉기의 정체는 다양하다. 시래기뭉치, 고등어나 고깃덩어리가 대다수지만 가끔은 곰국 뭉텅이가 소 한 마리라도 때려잡을 해머로 변해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이 겨우 발등을 짓이기고 마루판이나 움푹이 파놓고 시치미를 떼곤 한다. 악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깨금발을 딛고서 펄쩍거리는 우스운 꼴을 보란 듯이 즐기는 사디스트다.

주인에게도 잘못은 있다. 선입선출 법칙을 어긴지 오래다. 한구석에 처박힌 명태포는 햇수를 두 해는 넘겼고 양념 가운데는 몇 달을 넘긴 것이 드문드문 섞여 있다. 재고 파악을 하지 않고 쟁여놓은 재료들이 주인의 머릿속처럼 어지럽다. 문짝에다 재고 파악을 해서 써두고서도, 메모지에 사야 할 물건만을 적어가도, 그것조차 잊는다. 견물생심이라 닥치는 대로 사다 두는 통에 비움이란 단어를 잊은 지 오래되었다. 인간의 수명이 유한함을 잊고 살 듯이 녀석의 품 안에든 모든 것들은 유통기한이 무한하다고 착각하는 통에 버리지도 못하고 자리 차지만 하고 있다.

주인은 녀석과 닮은 구석이 많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꾸만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이다. 채우고 채워도 뭔가 허기진 듯, 물건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더 나은 자신에 대하여 욕심을 부린다. 창고처럼 쟁여두기에 신선한 것을 먹지 못하는 것처럼 ‘조금만 더’에 얽매여 반짝이는 오늘 하루를 잊고서 산다. 소중한 것들은 이미 자신 안에 있는데 두리번거리며 무얼 찾아 헤맨다. 녀석과 주인의 교감이 낯설지 않음은 서로의 닮음을 이미 알아보았기 때문이리라.

밤새 잠들지 못한 것을 핑계로 ‘냉장고’ 녀석의 속을 정리한다. 냉장 기능과 냉동기능이 같이 있지만, 냉장고라 불리는 것이 정체성 하나를 잊고 사는 어머니 혹은 아내의 모습처럼 처량하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은 썩어가는 것이 냉장고 속 물건 만일까. 목구멍 가득 삼키지 못한 이물감으로 울컥 뱉어내고 싶은 말들을 참은 날이 하루 이틀일까.

물건이나 사람이나 항상 선택의 귀로에 선다. 언제나 선택은 항상 조금의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다. 얼룩진 곳을 닦고 양념과 음료를 분리하여 정리하고 김치와 장류 칸을 선을 지켜 구분한다. 녀석의 깊은 속을 헤집어 동태와 불린 미역, 매생이, 굴, 냉동 새우를 찾아내어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선택한다. 수명을 다한 명란 마요, 녹차 잼, 두반장을 과감히 버린다.

각자의 선을 넘지 않는 것,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기는 게 물건의 정리에서나 사람과의 사이에서나 지켜야 하는 법칙이거늘. 해묵은 감정과 좋은 추억을 함께 버무려 쟁여만 두면 비좁아진 마음에 성에만 두꺼워진다. 아픈 기억들을 덜어내어 공간을 만들어 두어야 즐거운 추억들도 여울여울 펼쳐낼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주인이 녀석의 이마에다 새로운 메모지를 붙여두었다. ‘냉장고 파먹기’ 노란 포스트잇에 쓴 글씨에는 단호함이 배였지만 시큰둥한 반응이다. 녀석은 ‘며칠이나 갈까?’ 못 본 척 시침을 뗀다. 살아남은 식재료에 명찰을 달고 포스트잇에도 똑같이 적어둔다. 정리를 마치고 보니 냉동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비닐봉지에서도 살아남은 재료가 있다, 버려야 할 것들만 가득 찬 줄 알았던 마음에 지극한 사연과 기억들이 남아있다. 그것을 아껴먹으며 사는 것도 쏠쏠한 기쁨이지 않은가.

자신 안의 욕망과 불안이 들끓는 소리로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곤곤한 삶의 응어리들이 제 발등을 찍어대는 무기가 되어 신음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 밤이면 함께 울어주는 냉장고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워 앉는다. 매끄럽고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전달되어 부끄럽게 달아오른 몸과 마음을 식힌다. 그런 새벽이면 동굴 같은 문을 열어 청소한다. 복잡하게 날이 섰던 가슴이 날큰해지고 건물과 건물 사이 보이는 해를 품은 물결처럼 잔잔해진다.

<좋은수필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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