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힌 김남조(96) 시인이 1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여성 시단의 최고 원로이자, 1000여 편의 시를 쓰며 펜을 놓지 않았던 영원한 현역. 그는 3년 전 낸 마지막 시집 ‘사람아, 사람아’에서 “나는 시인 아니다. 시를 구걸하는 사람이다. 백기 들고 항복 항복이라며 굴복한 일 여러 번”이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시 ‘사랑, 된다’에선 한평생 씨름했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긴 세월 살고 나서/ 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 이즈음에 이르렀다/ …사랑 된다/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 된다 다 된다’.
고인은 ‘사랑’의 가치를 역설하는 작품으로 차갑게 식은 한국 사회에 온기를 불어넣어 왔다.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후쿠오카 규슈여고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도중인 1950년 연합신문에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시작으로, 열아홉 권의 시집과 다수의 산문집, 평론집 등을 냈다. 초기 작품에선 인간성과 생명력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한국 사회의 상처를 보듬는 한편, 산업화 이후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실존적 고민을 작품에 소환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시인은 후기 작품에 이르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랑을 작품에 표현했다. 모윤숙(1909~1990), 노천명(1911~1957)의 뒤를 이어 한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문을 연 시인으로 평가받으면서도, 특히 ‘사랑의 시인’으로 불렸던 이유다. 숙명여대에서 문학을 가르쳤고,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여류문학인회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은관문화훈장(1998), 만해대상(2007) 등을 받으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시인은 생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으나, 6·25전쟁을 거치며 형제가 모두 죽었다. 아버지도 어린 시절 사망,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10대에 폐결핵에 걸리며 가톨릭 신앙에 눈을 떴다. 결혼도 절망적 삶을 바꾸지 못했다. 종교 조각 분야의 거장 김세중(1928~1986) 서울대 미술대 교수와 결혼했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로 네 자식을 홀로 돌봐야 했다. 노년에는 심장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치료받았다. 그럼에도 “노년의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숨 쉬는 일이 위대하고 가슴 벅차게 느껴진다”고 말했던 시인이다. 열일곱 번째 시집 ‘심장이 아프다’(2013)에 수록된 시 ‘혈서’에선 자신의 시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은밀한 혈서 몇 줄은/ 누구의 가슴에나 필연 있으리/ …사람의 음성은/ 핏자국보다 선명하기에’. 90이 넘은 나이에도 펜을 놓지 않으며, 작품을 끊임없이 발표한 힘의 근원이 엿보이는 대목.
그의 시는 기도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종교적 경건함을 노래하며, 수많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며 노래한 ‘편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고 노래한 ‘설일’(雪日)을 비롯해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진 시편이 다수다.
생의 말년에 주목한 것은 ‘자연’이다. 그는 시집 ‘심장이 아프다’에서 “모든 사람, 모든 동식물까지가 심장으로 숨 쉬며 살고 있는 이 범연한 현실이 새삼 장하고 아름다워 기이한 전율로 치받으니, 나의 외경과 감동을 아니 고할 수 없다”라고 썼다.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돌이켜보며 말했다.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심장이 아프다’ 중에서). 그는 2020년 마지막 시집을 낸 뒤 본지 인터뷰에선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전부가 아니고 시를 읽는 것도 중요하니 못다 읽은 책을 읽고, 못다 들은 음악 들으면서, 좀 헐렁하게, 얼마 남지 않은 생일수록 그 신비를 다양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싶다”라고 했다. 이제 그는 또 다른 생의 신비를 찾아 떠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