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신접살이 / 강천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분주하던 까치집에 이제야 고요가 깃들었다. 드디어 알 품기에 들어간 모양이다.
까치 부부가 둥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새해가 막 시작된 무렵부터였다. 이 나무 저 나무를 오가며 물색하더니 마침내 공원 가장자리 팽나무를 집 자리로 골라잡았다. 겨끔내기로 나뭇가지를 물어와 기초를 놓은 후 스무날이 넘도록 공사는 계속되었다. 얼마나 부지런을 떠는지 체력이 버텨낼 수나 있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부부의 안달과는 달리 까치집은 모양새가 엉성해 보였다. 대략 오십여 미터 간격을 두고 이웃하는 둥지가 서너 개 있다. 그네들의 집은 약간 둥그스름한 데 비하여 이들의 집은 길쭉하게 늘어져 있었다. 마치 집 두 개를 아래위로 이어 붙인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나마도 중간 부분은 더 허술해 조롱박처럼 잘록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말거나, 부드러운 털로 속집 알자리까지 완성해 가는 듯 보였다.
찬바람이 몹시도 드세게 불었던 밤이 지났다. 지켜본 것도 정이라고 댓바람부터 까치집으로 달려갔다. 불길한 예감은 어찌 이리도 잘 들어맞는 것일까. 나무 위에 있어야 할 까치집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까치들도 영문을 모르는지 잔해만 걸려있는 가지 부근을 오가며 깍깍거리고 있었다.
근처 집들은 멀쩡한데 왜 이 집만 부서져 버린 걸까. 추측건대 경험 부족이었지 싶다. 다른 집들은 한 가지가 Y처럼 갈라지는 지점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 들은 두 가지가 X형으로 교차하는 곳을 선택한 탓이다. 엇갈린 가지는 바람이 불 때마다 따로 노는 구조라 당연히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집이 길쭉하게 된 까닭도 수시로 늘었다 줄었다 하는 간격을 메워보려는 자구책이었던 셈이다.
새로 집을 짓기에는 너무 늦어버리지나 않았을까. 상심한 까치가 포기해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조바심하며 다음 날 공원을 찾았을 때, 이게 웬일인가. 하루 만에 마음을 다잡았는지 곁에 있는 벚나무에다 새 공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 번의 실패가 약이 되었든지 자리만큼은 제대로 골랐다. 웬만한 바람에는 끄떡하지 않을 곳이지만 문제는 가지 간격이 너무 넓어 기반 다지기가 여의찮아 보인다는 데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 아래에는 떨어뜨린 가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또 결말이 뻔히 보였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마음의 응원밖에 없으니.
무엇엔가 얽매이게 되는 것이 곧 번뇌라고 했다. 마음 쓴다고 어찌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눈앞에 까치집이 아른거렸다. 이것을 일러 아마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는 거겠지. 이틀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찾았을 때, 까치는 보이지 않았다. 또 실패다. 아니, 아무리 초보라도 그렇지. 다른 녀석들은 야무지게 잘도 짓는데 이들만 왜 이리 서툰 것일까. 모처럼 마음 준 녀석들이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 집 한번 제대로 지어보지도 못하다니. 새내기의 신접살이가 만만치 않아 보여 빈 나무만 애잔하게 치어다본다.
한 주일이 흘렀다. 혹여나 하고 다시 찾은 공원에서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느티나무로 옮겨 둥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만큼 절박했을까. 그만큼 간절했을까. 벌써 절반 정도나 완성해 가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딱 알맞은 집터다.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떠나지 않아서 고마웠고, 희망을 잃지 않은 게 기특했고, 새로이 시작한 용기가 대견했다.
서양의 경험론자들이 “지식은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경험이야말로 삶을 살아가는 본원적 재산이라는 말이다. 미숙은 성공과 실패라는 경험을 통해 성숙으로 나아간다. ‘안목이 생겼다’ 함은 그만한 경험이 쌓였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터. 과정을 극복하면서 얻는 통찰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이라는 말.
“그래, 얘들아. 삶은 누가 알려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 이루어나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