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의 하늘

 

 

이리나

 

 

한국엘 다녀왔다. 나에겐 20여년 만에 가는 나들이였고 엄마는 근 30년 만이었다. 이번 여행엔 한국을 TV와 인터넷을 통해서만 아는 미국에서 태어난 나의 두 딸들도 같이 갔다. 물론 이 둘에겐 첫 방문이다. 원래 계획은 남편과 함께 온 가족이 가는 것이었지만 사정상 남편 대신 엄마가 동행하기로 했다. 가기 일 년 전부터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가는 날도 아이들 학교 방학하는 유월로 정했다. 두주 반 정도 체류할 예정이어서 미리 직장에도 알렸다. 한국에 있는 친척들과 연락은 엄마 몫이었고 비행기 표 예매와 관광 일정 잡는 것은 내 몫이었다.

 

가기 얼마 전에 북한에서 한국으로 대포를 쏘았다. CNN을 비롯한 언론매체에서는 연일 한국과 북한의 위기감을 뉴스로 대서특필을 해댔다. 곧 전쟁이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온 식구가 모여서 회의를 했다. 급한 마음에 한국으로 전화를 했다. 사촌 언니가 걱정하지 말고 오라 했다. 가끔씩 북한에서 한국을 향해 대포를 쏘아 댄다고 했다. 아무 일 없을 거라며 다녀가라 했다. 북한은 그런 나라였나? 이리저리 생각 끝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래도 염려하는 남편과 가족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을 뒤로 하고 설레는 마음을 갖고 한국으로 향했다.

 

도착하는 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장마의 시작이라 하늘은 두꺼운 구름으로 뒤덮였다. 그리운 얼굴들과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아무도 북한에서 쏜 대포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괜한 호들갑에 아이들까지 걱정시킨 것 같아 미안했다. 제주도로 향했다. 섬이라 그런지 바람과 비가 세차게 몰아쳤다. 그래도 비가 잠시 멈추는 틈을 타서 관광을 했다. 제주도는 하와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가 오자 관광지에서 우비를 파는 아저씨가 나에게 열심히 중국말로 사라고 권했다. 살까하며 망설이고 있자, 그 옆에 부인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일본말로 사라고 했다. 저쪽에서 비를 맞고 있던 딸들이 와서 영어로 우비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젠 영어로 말했다. 4개 국어를 하는 두 내외의 열정에 못 이겨 식구 수대로 우비를 샀다. 여행이 끝날 때 까지 그 우비를 참 요긴하게 썼다.

 

다음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우리를 내내 따라다니면서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그쳤다. 한국에서 이런 맑은 하늘은 처음 봤다. 서울에 있을 때 보았던 하늘은 비가 온 뒤라 우중충한 회색빛이었지 푸른색이 아니었다. 부산은 옛날 한국에 살았을 때도 가보지 못한 도시였다. 낯선 땅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본 하늘은 전에 살았던 내 고향의 하늘을 생각나게 했다. 그제야 내가 한국에 있다는 걸 실감했다. 마치 명장이 심혈을 다해 그린 듯 채도와 명도가 정확히 분포된 파란색의 수채화 하늘 밑에서 종일 지내자 온 맘이 포근해지기 시작했다. 말은 통하지만 낯선 사람을 만나고 낯선 곳을 지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이제야 풀리는 듯했다. 드디어 나를 낳아준 조국에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한 없이 쳐다봤다. 바로 이 색깔이었다. 내가 그립도록 보고 싶었던 바로 그 하늘색이었다.

 

살고 있는 L. A의 하늘이 스카이 블루 색에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는 만화 심슨 가족의 커버 하늘이라면, 뉴욕이나 아틀란타, 또 내시빌에서 본 하늘은 티파니의 하늘색이었다. 이런 하늘은 아니었다. 멕시코에서 본 하늘은 더더욱 아니었다. 한국에서 처음 본 하늘은 너무 아름다웠다. 고려청자의 색이라 할까. 옥색과 터키석 빛깔을 적절히 섞은, 나의 부족함과 어리석음까지도 너그럽게 감싸줄 것 같은, 그런 포근한 파란 비로도의 하늘이었다. 마침내 나는 고향에 왔다. 서서히 긴장감을 풀고 전라도 사투리가 간혹 보이는 서울 말씨의 관광버스 운전사를 보았다. 처음 본 사람이었다. 나의 조상은 이 땅에서 몇 천 년을 살았다. 분명히 그의 조상도 그와 같을 것이다. 어느 누가 이 사람과 내가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장담하겠는가. 다시 본 그의 얼굴은 정다웠다. 축농증이 있는지 가끔씩 킁킁대서 눈살이 찌푸려졌는데 이 하늘 밑에선 그를 위한 기도가 절로 나왔다.

 

갑자기 옛날 국어 시간에 배웠던 글이 생각났다. 한국의 하늘에 대해서 쓴 글이었다. 그때 그 글을 읽으면서 하필이면 왜 하늘에 대해서 썼을까 하고 의아했다.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혹시 그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푸른 하늘을 보면서 잊고 살았던 옛 추억이 그리워진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나와 같이 고국의 하늘을 보면서 옛 일이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난 미국에서의 삶이 내 생활의 전부인줄 알고 살았다. 삶은 현실이니까. 현실은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난 무엇을 잊어버린 지도 모르고 살았었다. 전에 이 땅에 살았을 때 항상 보곤 하던 하늘 아래서 마침내 나는 그동안 망각의 세월에 묻혀두었던 나의 처음 삶과 교우를 했다. 가물가물한 어릴 적 기억이 한 순간에 다운로드가 된 듯 했다. 반쪽의 삶이 아니라 드디어 난 하나가 되었다. 충만함이란 혹여 이런 느낌이 아닐는지.

 

차는 강릉을 지나 설악산으로 향했다. 가랑비는 계속 내렸다. 차창으로 보이는 산들은 정겨웠다. L. A.의 근교에서 흔히 보는 누런 민둥산이 아니라 푸른 숲이 우거진 산들이었다. 오랜 만에 눈이 시원했다. 길재의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가 절로 떠올랐다. 의구한 산은 내 기억보다 더 푸르렀고 하늘은 더 깊었다. 설악산에 도착했다. 어느새 사왔는지 엄마는 갖가지 색깔의 감자떡을 보이며 먹으라고 줬다. 평양에서 살다가 한국 전쟁 때 피난 와서 정착한 강원도는 엄마의 제 2의 고향이다. 가끔씩 옛날 어릴 적에 드시던 감자떡이 먹고 싶다는 얘기를 하셨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많이 살아 한국과 다름없다는 L. A.의 어느 가게의 감자떡도 엄마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어느덧 칠십이 넘으신 엄마는 색색 깔의 감자떡을 드시면서 연실 ‘옛날하고 맛이 똑같아‘를 하시며 흐뭇해 하셨다. 미국에 이민 간 후 첫 방문이신 엄마는 이번 여행 내내 즐거워 하셨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들에게 한국에 대해서 물었다. ‘it's okay.'라는 말에 좀 실망했지만 또 오고 싶다는 말에 희망을 가졌다. 한국은 애플의 아이폰보다 삼성의 스마트 폰이 더 많은 나라다 또한 오천년의 역사가 살아서 꿈틀대는 나라다. 난생 처음 온 한국이 매일 살아서 눈에 익은 내 마을 같지는 않겠지만 코리안-아메리칸으로 자부심을 갖고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번 한국 여행을 통해 내가 아는 하늘은 한층 더 넓고 깊어졌다.

 

 

10/11/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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