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 - 나의 엄석대
이리나
스캇이 또 한 다발의 서류 뭉치를 들고 왔다. 신입사원이라 모르는 사항이나 의문 나는 일이 있으면 찾아와서 묻곤 한다. 벌써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지도 거의 이십년이 되었다. 간혹 삼십년, 사십년씩 일한 사람들도 보이지만, 이젠 나도 제법 선임이다. 이번 일처럼 새내기들이 물어볼 때면 답해주는 것이 성가실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 일의 분량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시간을 들여서 일일이 설명을 해주고, 때로는 다른 부서까지 전화해 일을 해결해 줘야하니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이 일도 지난번의 문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 해줄까 하다가 노라를 생각했다. 그녀라면 스캇이 몇 번씩 같은 문제를 가지고와 의논을 해도 항상 처음처럼 상냥하게 대해줄 것이다. 야무지고 싹싹하게 일 처리를 해서 아마 스캇이 똑같은 일을 가져오게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나하고 망설일 때 마다 난 마음속으로 노라에게 묻는다. 노라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했을까. 노라라면 뭐라고 해 줬을까. 노라라면... 그녀는 어느 틈에 나의 큰 바위 얼굴이 되었다.
노라. 노라는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직장 동료다. 모든 것이 낯 설기만한 첫 직장. 이 곳에선 신입사원이 되면 이년정도의 트레이닝을 받아야한다. 그것을 패스해야 정식 사원이 되기 때문에 우리 동기들은 서로를 도와가면서 혹독한 트레이닝을 함께 받았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아이리시계의 노라였다. 선한 갈색 눈동자를 한 삼십대 중반의 노라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항상 자신 만만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 시간을 맡은 강사가 질문을 할 때마다 막히지 않고 대답 했다. 그러다가 모르는 사항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얘기를 하는 우리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약간 펑퍼짐한 몸매의 노라는 남편이 금발을 좋아한다며 항상 머리를 물들었다. 아기를 갖고 싶어 했지만 치과 의사인 남편이 아이를 원치 않자 애완용 개를 자기 아들이라 했다. 트레이닝이 끝날 즈음에선 우리 둘은 상당히 친해졌다. 노라가 나보다 십여 년 연상이었지만 우린 서로 통했다. 당시 싱글이었던 나는 한참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우린 사랑에 대해서 남자에 대해서 그리고 일상의 자잘한 생활에 대해서 수다를 떨곤 했다. 트레이닝이 끝나는 날, 서로 다른 직장으로 배정을 받고, 노라와 마지막으로 점심을 먹은 것이 내가 마지막 본 그녀의 모습이었다.
얼마 안 있어 난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일 다니랴 육아하랴 바쁘게 십년을 보냈다. 가끔씩 노라의 소식이 들렸다. 주로 좋은 소식들이었다. 어렵고 골치 아픈 케이스들을 척척 아무 문제없이 처리했다는 소식들이 들렸다. 나는 어깨가 으쓱 해졌다. 바로 그 노라를 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빨리 그녀가 높은 사람으로 승진해서 내가 일하는 곳으로 왔으면 바랬다.
오랜만에 노라가 일하는 오피스엘 들렸다. 그곳에서 일하는 흑인인 마이클과 의논할 일이 있었다. 이야기가 순조롭게 끝나 점심을 같이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노라에 대해 물었다. 오피스에서 못 봤는데 오늘 아팠냐고 물었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마이클이 노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그녀의 근황을 얘기했다.
어느 날 아침 노라의 사무실로 우편이 배달되었다. 그 전날까지 저녁 함께 먹고 한 집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같이 출근하던 남편이 보낸 이혼 서류였다. 나이어린 히스패닉계의 간호사가 자기의 아이를 가졌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오십을 바라보는 노라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근 일 년 동안의 이혼 소송에 지칠 대로 지친 노라는 우울증과 술에 빠졌다. 일을 제대로 못하고 출근도 못 할 때가 많았다. 보다 못한 매니저가 육 개월의 병과를 줬지만 재출근후 일주일 만에 사표를 냈다. 정신이 멍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레스토랑을 나와 작별 인사를 하는데 저쪽에서 어떤 구질구질한 옷을 입은 뚱뚱한 여자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마이클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마이클한테도 이런 친구가 있나하고 궁금해진 난 능글맞게 웃었다. 구십 도가 넘는 이 더운 낮에 행여 바람이라도 들어갈까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얼굴엔 검버섯이 잔뜩 핀 여자가 환히 웃으며 있다. 한 눈에 봐도 노라였다. 놀란 난 무심결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잠시 나를 보더니 ‘리나’하면서 반갑게 두 팔을 벌려 안았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기를 바라며 그녀를 안았다. 눈을 꼭 감았다. 봐선 안 될 사람을 본 것이다. ‘오 하나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안됩니다. 하나님, 안됩니다. 나의 노라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속으로 끝없이 울부짖었다. 내 앞에 노라가 있다. 나의 엄석대가 서있다. 지금 내 품에 몰락한 나의 일그러진 영웅이 쥐 뜯어 먹은 머리를 하고 더러운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있다.
우린 서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다음에 다시 보자며 헤어졌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작 내가 꺼낸 말은 ‘안 더운가!’였다. 마이클은 지금은 저렇게 웃으면서 다녀도 아마 약기운이 떨어지면 아무 곳에서나 퍼지고 잘 거라 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옷은 한번 빨아선 냄새가 가시지 않겠구나하는 생각도 퍼뜩 들었다. 순간 나의 교만함에 씁쓸해졌다.
집으로 오는 차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 만만 하던 그 여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자상하게 채워주던 그 여자, 위트가 넘치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그토록 도란도란 얘기를 하고 정답게 지내던 날들이 떠올랐다. 꿈이었던가. 환상이었던가. 알 수가 없었다. 마약에 취해 하루하루를 멍하게 살아가는 이 여자와 노라는 정녕 같은 사람이었던가. 과연 나의 노라는 어디에 있을까. 대답 대신 눈에선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영영 그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한 없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해버린 나의 엄석대인 노라. 그 만남이후로 한동안 나의 기분은 끕끕했다.
9/29/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