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에

 

 

이리나

 

가을이다. 밖에는 비가 온다. 캘리포니아는 가뭄이 한창인데 잠시나마 그 가뭄을 해갈시켜 줄 단비다. 수요일은 아니지만 이런 날엔 빨간 장미 한 다발을 사서 곁에 두고 싶다. 짙은 장미 내음이 눅눅한 공기에 섞여서 방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바람이 부는 지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친다. 비 오는 날 학교에서 공부 하던 생각이 난다. 창가에 앉았던 나는 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빠져 공부에 집중을 못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학교생활에, 나의 삶에, 회의를 가졌던 때였다. 오직 물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던 제한적인 시야를 가졌던 나의 사춘기. 가지고 싶은 물건은 많았고 집안 형편은 여유롭지 못 했다. 그렇게 암울하고 힘들었던 소녀시절을 난 친구들 덕분에 아무 사고 없이 보냈다.

 

창문 밖으로 흐르는 빗물을 보면서 잊었던 얼굴을 떠올린다. 영희, 은정이, 미숙이, 지숙이, 은경이……. 그네들이 그립다. 다들 그만그만한 처지에 있어서 물질적으로는 못 도와줘도 든든히 곁에 있어준 그들이 고맙다. 암담한 나날들을 보낼 때 하나씩 둘씩 와서 나의 손잡고 같이 걸어가 준 사랑하는 사람들. 평안한 일상을 보내는 지금도 가끔 그때 함께 해준 그이들이 생각난다. 그사이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연락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 벌써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미 내 나이 불혹을 훨씬 지났다. 우정이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일부러 친구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이젠 여유를 갖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좋은 벗이 되고 싶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라는 마음으로 가을 편지를 쓸 수 있는 맑은 영혼의 사람이라면, 내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녀의 벗이 되리라. 설령 여린 마음의 그녀가 지천명이 넘었다 해도 동무하며 지내련다.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에 그녀가 스스럼없이 전화해 대화할 친구가 되리라.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이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면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스럽게 안부를 묻겠다. 쇼핑 몰에서 좋아하는 연예인을 봤다고 들떠서 말하는 목소리엔 정말 실물도 그렇게 예쁘냐고 수다스럽게 물으련다. 갑자기 뛰어든 앞차를 뒤에서 들이받는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를 냈다며 흥분해서 두서없이 하는 말도 끝까지 인내하며 아무 말 없이 들을 것이다. 섣불리 이리저리 조목조목 따지고 옳고 그름을 밝히며 그녀를 판단하지 않으리. 돌연한 지인의 죽음에 슬퍼서 조리 없이 하는 넋두리도 조용히 듣겠다. 어설픈 말로 위로하기보단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리라. 또한 심통스럽게 말허리 끊고 내 얘기를 시작하지 않으련다.

 

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나, 남편의 이야기나, 친정이나, 또는 시댁 식구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겠다. 그녀 또한, 두 번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던 지, 요즘에 유행하는 옷이나 구두, 또는 핸드백 따위의 시시한 이야기나, 인기 있는 학원이나 과외 선생의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의 미래를 말할 것이다. 이미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아갈 나날 보다 더 많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앞날을 계획하고 논할 것이다. 전혀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라 하겠다. 아주 황당한 꿈이 아니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충고하련다. 만약 춤을 배우고 싶다면 어서 시작하라고 권하리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쉬왈쯔 교수처럼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몸이 가뿐해 질 때까지 춤을 추라 할 것이다. 만약 동호인들이 모여서 댄스 발표회라도 하면 기꺼이 시간을 내서 가 보겠다. 동작이 틀려도, 한 박자 늦어도 뭐라 하지 않고 늦은 나이에 시작한 그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련다. 그리고 한 묶음의 잔잔한 데이지와 안개꽃을 선사하겠다.

 

이렇게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엔 솜씨 좋은 바리스타가 있는 동네 커피 삽에서 만나련다. 보드라운 거품이 가득한 향긋한 커피를 마시겠다. 자기 얼굴에 묻은 거품은 모른 체, 내 얼굴을 보고 웃으며 닦으라고 건네주는 냅킨을 받으리라. 고가의 화장품 샘플을 주며 그녀의 얼굴에 낀 기미에 대해 이야기 하진 않으리. 하얗게 삐죽이 자란 뿌리 쪽의 흰 머리를 보며 리터치 할 때가 지났다고도 하지 않으련다. 더불어 그녀의 과거도 묻지 않으리라. 그저 그녀를 지금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겠다. 그녀가 주저하며 디저트를 두 개나 시켜도 핀잔주지 않겠다. 기꺼이 나도 초콜릿 케이크와 스트로 베리 무스 케이크를 시킬 것이다.

 

까만 곱슬머리에 까만 모자를 쓴 칼로스 산타나의 현란한 음악을 들으리라. 그의 기나긴 손톱으로 연주하는 기타 소리를 들으며 초콜릿 케이크의 달콤함을 음미하겠다. 시답잖은 잡담으로 이 아름다운 순간을 훼방치 않으리. 또 우리는 핸섬한 아담 르벤이 리드 싱어로 있는 마룬 파이브의 노래를 듣고 지나가는 사람의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볼 것이다. 바람이 연주하는 쉼 없이 내리는 비의 향연을 관람할 것이다. 비 맞고 서있는 가로등과 가게의 간판과 도로 표지판과 신호등과 전봇대와 크고 작은 빌딩들과 그 사이에 있는 작은 시멘트 담들을 바라보리라. 이런 생명 없는 것들이 빗속에서 얼마나 운치 있게 서있는지,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것이다. 잔뜩 내려온 시커먼 구름을 보면서 천천히 식어가는 커피를 마시리라. 그리고 우린 벽에 걸린 어설픈 삼류화가의 그림들을 보며 인상주의자인 클로드 모네의 영향을 받았네, 신인상파 화가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네, 아니면 순수 미술가인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았네 하는 어쭙잖은 토론을 할 것이다.

 

우린 서로를 진실히 대할 것이다. 위선의 탈을 벗고 서로에게 정직히 대할 것이다. 내 비록 항상 곁에 있지 못하겠지만 그녀가 더 가지 쳐 자라도록 옆에서 지켜 볼 것이다. 내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앞에서 이끌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지 않고 옆에서 같이 길을 갈 것이다.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그녀 곁에서 나의 영혼도 맑아지기를 바란다. 그 기대를 갖고 손 편지를 쓰겠다. 이메일이 아닌, 카카오 톡이 아닌, 페이스 타임이 아닌 편지를 정성들여 손으로 쓰겠다. 팬시 문구점에 가서 잔잔한 파란 파스텔 칼라의 편지지를 사리라. 그리고 언젠가는 만날 그녀에게 건네줄 그리움을 쓰련다.

 

친구야.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니.

 

2/12/2015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