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의 풍경 소리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천수경 읊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오늘도 새벽 예불을 드리지 못했다. 한 번쯤은 꼭 참석하려고 했는데, 미안한 마음에 방에서 나왔다.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산사는 앞이 트여 있어 시원스레 숲이 다 보였다. 쪽마루에 앉으니 천지가 설세계이다. 마치 달력의 한 장면 같다. ‘우지직~’ 쌓인 눈 무게를 못 이긴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이어서 “와르르‘ 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떨그렁떨그렁’ 처마 끝에 매달린 붕어가 새져진 풍경이 화답했다. 그마저 차가 왔다.
산에는 아침이 더디 온다. 저 멀리 점처럼 보인 움직임이 점점 뚜렷해졌다. 아직 사위는 어두웠지만, 새벽 예불을 끝낸 스님인 듯, 그런데 선이 부드러운 자태로 보아 출가한 나의 이모 같다. 며칠간 내린 폭설로 한 사람이 걸어 다닐 정도의 길만 치워 놓았는데 그마저도 차가운 산바람에 얼었다. 살얼음판 위로 조심히 걸어오시는 스님 뒤로 오래된 키 작은 적송이 눈을 가득 담고 서 있었다. 무채색의 승복을 입고 손수 뜬 회색 털모자를 눌러 쓴 스님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사람은 태어난 팔자대로 산다지만, 스님은 어릴 때부터 절집에서 살았다. 설경의 아침이 이토록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데 오늘은 유난히 더 고와서 눈물이 나왔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짐짓 먼 곳을 바라보았다.
“왜 우나.”
“세상이 너무 한스럽게 아름다워서요.”
목소리가 하도 정다워서 더는 눈물을 담아 둘 수가 없는데 차마 스님 때문이라 말하지 못했다.
“쯧쯧. 그리 물러 가지고 이 세상 어떻게 살아갈꼬.”
그런 나를 지긋이 바라보시고는 방으로 들어가는 스님에게서 은은한 향내가 났다. 새벽바람은 숨구멍에 서리를 내리려는 듯 쏘아 댔지만, 스님의 눈길이 닿은 내 등은 한없이 따뜻했다.
그해 겨울에 내린 많은 눈으로 길도 끊어졌다. 그런데 이 험한 눈길을 헤치고 늙은 보살 한 분이 찾아왔다. 며칠 만에 본 외부인인지라 다들 반가워했다. 젖은 옷을 벗고 공양주 보살의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제설차가 이 근처까지 길을 뚫어주어서 마을 어귀까지는 수월히 왔는데 산사까지는 힘들었다고 한참 너스레를 떨었다. 조용히 듣고 있는 나를 보곤 측은한 듯 가방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줬다. 오랜만에 보는 단것이라 사양치 않고 덥석 받아먹었다. 밖에서 고즈넉한 풍경소리가 들렸다.
산에는 밤도 일찍 스며든다. 잠이 안 와서 뒤척이다가 인기척에 밖으로 나왔다. 낮에 공양주 보살이 봤다던 살쾡이였나, 사방이 적요했다. 두텁게 두른 구름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민 달에 비친 숲은 선연했다. 낮에 푸르디푸르던 나무들이 시퍼런 달빛에 색을 잃었다. 짧은 겨울 해에 살짝 눈이 녹았던 나무들이 다시 얼어붙어 눈꽃을 피웠다. 까만색과 흰색의 조화, 달빛을 받아 이 세상이 아닌 듯,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했다. 혼자 보기가 아까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순간 나는 그해 여름에 본 납량특집극에 나온 구미호가 생각났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이 있는 꼬리가 아홉 개나 된다는 여우, 구미호. 이 구미호가 여염집 아낙으로 변신하여 걸어 다녀도, 아니면 본연의 모습인 여우가 되어 네 발로 달려도, 머리를 풀어헤친 채 큰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도, 설령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다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밤이었다. 아마 살을 저미듯 들리던 풍경소리가 아니었으면, 혼미한 정신에 날아와 박히던 풍경소리가 아니었으면, 홀린 듯 난 아직도 그 자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으리라.
스님이 입적하신 지도 여러 해가 흘렀다. 화장하고 나온 사리를 모아 사리탑을 만들었다. 사진으로 본 사리탑은 잿빛으로 선이 고왔다. 스님은 평생 구도하시던 걸 얻으셨을까. 찾아뵙고 여쭈어봐야 했는데. 그동안 삶의 터전을 엘에이로 옮겨서, 태평양 한 번 건너가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산에 눈이 지척으로 왔다는데, 구미호는 아직도 네 발로 활개 치고 다니려나.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