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잡기
이리나
복잡했던 하루의 일과가 끝났다.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방문을 연다. 어둡다. 불 꺼진 이 방. 지금 난 세상과 단절되었다. 어둠이 살랑대며 살갗을 스친다. 침대 옆에 앉는다. 잠시 후 어두움에 익숙해지자 이젠 무섭기보단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고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랜 만에 느끼는 아늑함이다.
하루 종일 더 많은 정보를 취하기 위해 문어발처럼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던 나의 텐티클들이 드디어 무디어 진다. 쉬지 않고 머리를 가로 지르던 생각들도 하나씩 가라앉기 시작한다. 몸이 느긋해지기 시작한다. 불을 키면 이 공간을 덮고 있는 안정감이 사라질 것이다. 몇 시일까? 10시쯤이라 생각이 든다. 갑자기 몇 시인지 모른다는 게 답답해진다. 인공위성과 연결돼 정확한 시간을 알리는 시계도 컴컴한 이 방에선 소용이 없다.
주위를 둘러본다. 스탠드에 놓여있는 작은 시계가 빨간 빛을 내며 10시 6분을 알린다. 그제야 안도했다. 10시 6분 몇 초까지는 몰라도 몇 시라는 걸 안 순간 시간의 흘러감에 내가 함께 동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려치는 번개같이 빠르게 또는 보드라운 봄 공기처럼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지만 시간은 항상 일정하게 흐른다.
시간은 공간을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 흔들리는 나뭇잎에서 스쳐가는 바람을 보듯 많은 세월의 흔적들 사이에서 우린 말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본다.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모였다가 하나 둘씩 떨어지는 물방울에서도, 작은 모래알이 조금씩 흘러내리는 모래시계에서도, 일초 이초 쉬지 않고 돌아가는 마이크로웨이브에서도, 시시각각 몰려드는 검은 먹구름 속에서도, 날이 갈수록 짙어 가는 재스민 향기에서도, 우린 머물렀다 지나가는 시간을 본다. 허나 이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시간은 어떻게 잡으려나.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바람은 주먹을 쥔다고 잡혀지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창가로 간다. 하얀 모슬린 커튼을 젖힌다. 창문 너머로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기대했는데 오렌지 나무에 가려서 하늘이 잘 보이질 않는다. 창문을 열고 나무를 본다. 저 나무 가지 치기하는 걸 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싹이 나고 잎이 자라서 창문을 가릴 정도로 컸는가. 그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시간은 항상 우리 곁을 지나는데. 가는 시간은 잡을 수 없는 것인가. 보이지 않게 흘러가는 시간은 전혀 붙잡을 수 없는 것인가.
이제 나의 눈은 어두운 실내 공간에 익숙해진다. 시계 옆에 놓인 딸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초등학교 시작하는 첫 날에 찍은 사진이다. 뭉글뭉글 엉긴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약간은 긴장되고 설레는 표정이다. 그래도 사진에 잘 나오고 싶어서 억지로 웃는 표정이 꽤 우습다.
문이 열리고 딸이 들어온다. 어두운 실내 공간에 놀란다. 불을 키려고 해서 말렸다. 내일 학교 필드 트립을 간다며 사인을 해달란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달빛에 딸의 실루엣이 또렷이 보인다. 언제 저렇게 컸나 싶다. 벌써 5 학년이다. 내년이면 중학교엘 간다. 종이에 사인을 해주고 가만히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의 이런 뜬금없는 행동에 놀란 딸의 눈이 점점 커진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가만히 안아주었다. 아직도 품안에 꼭 차는 딸아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마미, 아 유 오케이?”
“응. 엄마는 괜찮아.”
어느 틈에 이만큼 커서 엄마를 걱정하는 딸의 사랑이,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전해진다. 키가 자라듯이 조금씩 성장해 가는 딸의 마음을 느낀다. 별을 스치고 온 바람에 아이의 긴 머리가 어깨에서 찰랑인다. 달콤한 오렌지 꽃향기도 살포시 난다. 그와 동시에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친다. 딸과 있는 이 시각. 시간의 흐름이 온 몸으로 퍼진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시간을 잡았다.
8/9/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