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뒷모습
이리나
지난밤에는 바람이 몹시 불었다. 내가 사는 샌퍼낸도 밸리에는 산에 나무가 없다. 높은 산이라도 민둥산이니 그냥 높은 언덕처럼 보인다. 나무는 사람이 사는 곳에만 있다. 간밤에 집 근처 나무와 가로등을 스쳐 가는 바람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심한 바람에 주차한 차 옆의 가로수가 뽑히지 않기를 바라며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 앞으로 나가보니 다행히 가로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로는 밤새 떨어진 나뭇잎으로 덮였다. 치울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뒤란으로 향했다. 캘리포니아는 가뭄이 심하다. 물 낭비를 막기 위하여 잔디를 심는 대신 뒤뜰을 시멘트나 작은 블록으로 채우는 집들이 많다. 이 집도 전 주인이 작은 뒤란을 시멘트로 발랐다. 이 집을 살 때는 그래도 흙이 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시멘트 바닥이 청소하기는 편했다.
우리 집 뒤뜰에는 나무가 없다. 우리 집과 맞닿아 있는 이웃집에는 큰 나무들이 있다. 여름에는 그늘을 주어서 좋지만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낙엽이 뒤뜰로 떨어진다. 그 집에 연락해서 너희 낙엽이니 치워가라 할 주변이 못 되니, 이렇게 바람이 사납게 부는 날이면 뒤뜰을 가득히 메우고 있을 낙엽 치우려는 생각에 난감해진다. 올이 성긴 빗자루로 아무 곳에 나뒹구는 낙엽을 모으노라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가 간혹 떠오른다. 낙엽 치우는 일은 노동이다.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쉴 새 없이 달려드는 하루살이도 쫒아내야 하고 끊임없이 다니는 개미 떼와 싸워야 한다. 다 치우면 초록색 쓰레기통의 반이 채워진다. 낙엽을 태운다는 생각도 못 한다. 냄새와 연기를 보고 놀란 이웃집 할머니가 알아보지도 않고 소방서에 전화할 것이다. 실제로 팜스프링스에서는 집 뒤뜰에서 낙엽을 태우다가 불이 차고에 번져 다 타버린 일도 있었다.
오늘도 나뭇잎 치울 생각을 하며 뒤뜰로 향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든 채로. 웬일일까. 시멘트 바닥이 보였다. 그 많은 나뭇잎은 어디로 갔을까. 자세히 보니 간밤에 불어온 바람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낙엽을 모아 놨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할 일의 반을 바람이 다 해 놓았다. 구석구석에 뭉쳐있는 낙엽을 빗자루로 긁어내며 바람에 고마워했다. 살다가 보니 이런 횡재를 하는 날도 있다. 여느 바람은 나무를 마구 흔들어 놓아 작은 뜰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는데. 이 바람은 달랐다. 어수선한 뒷모습을 남기지 않았다. 지나간 흔적이 깨끗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알고 있다. 살아온 세월의 자리가 정결한 사람. 그의 말대로 어쩌다 이 세상에 나와서 칠십하고도 몇 년을 살다간 사람. 그동안 받은 상처가 안으로 굳어져 남을 찌르는 가시로 변하지 않은 사람. 아. 진정 나는 이렇게 흔적 없이 가버린 사람을 알고 있다.
아름다운 자국을 남기고 떠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