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유감 / 조일희 

선남선녀가 웃고 있는 모바일 청첩장이 도착했다. 사진 아래 적힌 신부 어머니 이름이 평소 부르던 친구 이름이 아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촌스러운 본명을 그대로 쓰려니 창피하더란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번 참에 바꿨다며 전화기 속 ‘금자’가 깔깔 웃는다.

근래 들어 개명한 친구가 여럿이다. 주로 ㅇ순, ㅇ자, ㅇ옥으로 불리던 친구들이다. 한데 바뀐 이름 거개가 부자연스럽고 낯설다. 주름진 얼굴에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은 멋따기꾼 같아서이다. 오래 불러 편안한 이름 대신 흠치르르한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정든 연인과 헤어진 것 마냥 섭섭한 마음이 든다. 또 세련되게 바뀐 이름은 설익은 보리밥처럼 입안에서 겉돌 뿐 쉬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나 어쩌랴, 정작 당사자들은 만족해하니 애줄없다. 자주 부르다 보면 언젠가 입에 착 감기는 날이 있으리라.

과거와 달리 쉽게 그리고 거리낌 없이 이름을 바꾸는 세상이다. 이는 개명절차가 간편해졌기도 하거니와 이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성명학적으로 나와 맞지 않아서, 이름이라도 바꾸면 행여 꼬인 삶이 풀어질까 하는 기대 심리로, 또 촌스러운 이름 때문에 끌탕을 하다가 등등의 연유로 사람들은 이름을 바꾼다. 요즘은 치료를 위해 개명하는 경우도 있다. 좋은 이름을 부르고 들으면 긍정 에너지를 받아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흐른단다. 각양각색의 사람만큼 개명의 이유도 참으로 다양하다.

이름은 개인을 나타내는 표식이자 한 사람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이십여 년 전, 옷 로비 국회 청문회장이 떠오른다. 증인으로 참석한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TV나 월간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인이었다. 그날 '김봉남'이라는 예상치 못한 본명을 듣고 잠깐 웃긴 했지만, 외국 이름이 주는 이질감과 거리감이 '봉남'이라는 구수한 이름으로 좁혀진 것 또한 사실이다. 진정 이름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라도 있는 걸까. 멀기만 했던 그가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이름에 관해 얘기하자면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를 빼놓을 수 없겠다. 아버지의 함자는 조趙 문文자, 갑甲자이시다. 文자가 있어서일까, 아버지는 책은 물론이요 포장지로 소임을 바꾼 지난 신문지까지 샅샅이 읽으셨다. 하지만 읽는 데만 공을 들였지 文을 업으로 풀어내지는 못하셨다. 젊어 호기롭게 시작한 한지 공장을 타의로 문을 닫은 이후 아버지는 백면서생으로 사셨다.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읽으며 하루의 반을 보내고, 나머지 반을 읽으며 남은 반나절을 보내다 스스로 이승의 옷을 벗으셨다.

서류 뗄 일이 있어 주민 센터에 갔다. 제적등본에 적혀있는 아버지 성함이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文이 아닌 六, '조문갑'대신 '조육갑'으로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알아보니 행정 직원의 오기誤記로 함자가 바뀐 것이다. 혹자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멀쩡한 이름도 바꾸는데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뀐 이름 때문에 아버지의 인생이 꼬였던 건 아닐까. 불릴수록 운명화되는 이름의 속성을 아버지도 벗어나지 못하신 걸까. 그날 이후로 누군가 '육갑'이라는 말을 하면 아버지의 신산했던 삶이 떠올라 마음이 개운치 않다.

이름을 바꿔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그래서 행복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이 뜻한 바를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아버지. '만약 아버지 이름이 그대로 文자였다면 당신의 인생 또한 원하던 대로 되지 않았을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고작 글자 하나 바뀐다고 삶에 무슨 영향을 끼칠까마는 미완으로 끝난 아버지 인생이 안타까워 억지 한번 부려보는 것이다.

이름의 무게를 자주 헤아려 본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趙一姬를 뜻 그대로 풀어 보자면 나라에서 제일인 여자이다. 내 깜냥이 거창한 이름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잘 안다. 대신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오늘도 용을 쓴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이사 간 저승에서는 제대로 된 이름표를 달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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