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잎 / 박순태
역시나 역시였다.
떡잎이 빼곡하다. 끼리끼리 머리를 맞댄 박과 채소 모종을 두고 농장주는 수박, 참외, 오이를 구별해 보란다. 오종종한 모양새가 비슷비슷해 알쏭달쏭하다.
열매 크기가 언뜻 떠올랐다. 정답을 확신하면서 떡잎 크기순으로 수박, 참외, 오이라고 말했다. 주인은 빙그레 웃었다. 며칠 후에 들리면 답을 알 수가 있다면서 입을 닫았다. 돌아서 나오려니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조금 전에 봤던 것보다 크고 색깔이 진한 떡잎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맞출 수 있겠거니 싶어 호박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그는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싱긋 웃었다.
쌀가마를 메고 계단을 올랐다. 허리가 쑤시고 뜨끔거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며칠이 지났어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도, 정형외과에서 치료를 받아도 아픔은 그대로였다.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하기에 앞서 고통부터 호소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명의가 있다고 알렸다. 솔깃했다. 벌써 허리 아픈 증세가 조금 사그라지는 듯했다. 거미줄이라도 잡아보자는 긴박함에서 그랬던가, 침술사에게 몸을 맡기기로 했다.
입소문을 따라 치료를 받으러 갔다. 아파트 끝동 모퉁이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간판도 없을뿐더러 침술 자격증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잡힌 것은 ‘뜸 사랑’이란 명함뿐이었다. 숨어서 치료하는 침술사인 듯했지만, 소개해 준 사람의 믿음이 두터웠던지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잠깐 의심을 했던 마음을 책망하기까지 했다. 꿩 잡는 게 매가 아닌가. 통증만 잡히면 그만이지 또 무엇이 필요하랴 싶었다.
며칠 왕래하다 보니 얼굴이 익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과거사가 튀어나왔다. 십여 년 전에 암 수술을 했다고 하자 또 다른 불편함이 없는지 물었다. 그는 우리가 이전부터 알고 지냈다면 수술 없이 간단하게 치료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환상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침술사는 창가 의자에 앉아서 뱃속까지 빨아들였던 연기를 뿜어냈다. 담배를 그렇게 피우면 수명이 단축될 거라고 하니, 의사들이 지어낸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네들이 뭘 아는 게 있어야지”
병도 낫게 할 줄 모르는 자들이 더 날뛴다며 언성을 높였다. 침술사의 외침이 ‘나는 돌팔이요’라는 자백으로 들렸다. 밖에 나오자 몇 사람이 주억거렸다.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의사들을 들먹이다니….”
암센터에서 만난 의사들이 떠올랐다. 수술 후 십여 년간 정기검진을 받았다. 그동안 담당 의사가 몇 번 바뀌었다. 사람은 달라도 전하는 말은 하나였다. 데이터를 꼼꼼히 점검하고 나서는 수술이 잘 되어서 예후가 좋다고 했다. 선임자를 예우하는 후임자들의 말에서 훈훈한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완치의 믿음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침까지 튀기며 자신의 침술이 최고라고 앞세운 돌팔이 침술사와는 대조적이었다.
채소 모종이 궁금해 농장에 들렀다. 떡잎은 하나같이 속잎을 살짝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수박이요, 나는 참외요, 나는 오이요.’ 하면서 어미 자궁 밖을 나온 신생아가 자신을 알리려 첫울음을 터뜨리는 듯했다. 떡잎에서 솟아오른 속잎은 자신의 종을 알리는 증명서이자 미래를 약속하는 보증서이다. 선입견으로 열매 크기를 생각하면서 어림짐작에 따라 엉뚱한 이름을 붙였던 게 못내 아쉬웠다.
농장에 종종 들렀다. 수박, 참외, 오이의 속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줄기를 뻗고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경쟁하듯 덩굴손과 속잎을 쉼 없이 내밀지만, 서로 감거나 엉키지 않으면서 꽃피워 열매를 맺고 있었다. 속속들이 들여다보니 변함없는 것은 속성이었다. 수박은 땅바닥을 기면서 깃꼴 모양의 깊게 갈라진 속잎을 내고, 참외는 올록볼록한 주름을 가진 오각형 모양의 속잎을 내면서 수박과 같이 땅을 기고 있었다. 오이는 수박과 참외와는 달리 지주대를 타고 오르면서 짙은 녹색의 속잎을 내고 있었다. 폭풍우가 휘몰아쳐 찢기고 꺾이어졌어도 본질은 그대로였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말과 행동을 시시때때로 달리한다. 문제시되는 일의 진행 상태에 따라 이익이란 저울추를 들이댄다. 어제까지 멀었던 자가 오늘은 가까이 다가와 아낌없이 베풀 듯도 한다. 이제껏 네 것 내 것 따지지 않다가 어쭙잖은 이해다툼으로 구겨진 얼굴로 언성을 높이면서 상대한다. 식물도감을 펼쳐놓고 표시하듯 마주한 사람의 행동거지에 밑줄을 치며 만나야 하려나. 식물의 속잎이 어떤 식물인지를 알려주듯 몇 마디 말이나 행동거지로 사람 됨됨이를 감지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요원하기만 하다.
몇 번의 만남에 불과하건만 자신을 드러낸 돌팔이 침술사가 오히려 단순하고 순진한 맛을 풍기는 것은 왜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일편단심의 반려견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대중가요 가사를 떠올린다. 거리감을 두고 지냈던 상대가 베풂의 마음으로 다가오면 그 사람이 갑자기 좋아 보이고, 절친에게 용기를 내어 어려움을 호소했을 때 부탁을 선뜻 들어주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지곤 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일, 상대의 마음이 천 길이라면 내 마음은 만 길이었기에 그런가 싶다. 식물의 속잎처럼 변함없는 마음을 그려낼 자가 있기나 할까.
쉽게 방송녹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유치원생과 시골 노인이라고 들었다. 꾸밈없는 말투로 숨김없이 속마음을 그려내기 때문이지 싶다. 지식의 허영심에 들떠있거나, 세월에 찌들수록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이 강해져 허튼 싹을 틔우려 든다. 행실이 따라주지 않는 말이 오랏줄이 된다는 성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내뱉은 말에 묶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오늘 아침 뉴스에서 만났다.
파랗게 돋아나오는 식물의 속잎을 살피면서 여기까지 온 나를 되돌아본다. 좁은 생각의 우리를 넘지 못했고, 가벼운 말투로 건방지게 보이지나 않았을까. 그뿐이랴. 헛된 욕심을 채우려 줏대 없이 속물이 되지나 않았던가. 진국이라고 확신했던 사람을 일순간에 지워버리려 하지나 않았나. 예사롭게 받아넘길 일을 마음속에 매복해 있던 응어리진 울화통이 도깨비짓을 저지르지나 않았을까. 감정의 노예가 되어 기분 따라 변덕을 하기에 인간은 식물과 대별 되는가 보다.
열매 굵기를 떠올려, 떡잎 크기순으로 수박, 참외, 오이를 결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고정관념이 문제였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인간사에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믿음은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실의 적이다.”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식물은 자신의 기준을 절대평가로 속잎을 피워 올린다면, 인간은 상대평가의 잣대로 본색을 드러내면서 요란법석을 떤다. 역시나 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