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소리를 삼키다 / 안경덕
불볕더위에 매미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귀가 아릿할 정도다. 매미가 유별나게 울어 여름이 더 뜨거워지는지. 요란한 매미소리 따라 기온이 더 높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매미는 유충에서 성충이 된 후 짝짓기를 위해 수컷이 운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짧은 생을 한탄해서일까, 연서를 쓰는 것일까, 노래를 부를까 하는 의문이 인다.
메뚜기가 한철이듯 매미야말로 여름이 한철 아닌가. 매미는 땅속의 굼벵이로 살다가 7년 이후부터 몇 년까지 땅 위로 입성한다니 학수고대한 재탄생일 테다. 세상구경 한 달밖에 못 하는, 짧은 운명에 격정적으로 울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는가. 나도 매미가 밤낮 우는 까닭을 짧은 생을 ‘한탄해서다’에 한 표 보탠다. 성충이 된 뒤 하루만 산다는 하루살이보다 매미가 덜 가엾긴 하다.
하루살이는 하루가 일생이다. 그 하루 만에 정해진 일을 다 하고 죽는다. 새벽에 세상으로 나와 아침에 학교 가고, 오전에 졸업하고, 오후에 회사 출근하고, 저녁에 결혼하여 밤에 알을 낳는 속전속결이 상상된다. 만고불변한 하늘이 백 년도 못 사는 우리 인생을 굽어보는 것이나, 하루살이를 서글퍼 하는 우리와 무엇이 다르랴. 광활한 하늘한테 인생 백 년이 단 일초 안에라도 들겠는가.
나무가 잘났든, 못났든, 숲이 짙든 성글든 개의치 않는 매미가 성격이 아주 무던한 것 같다. 마당에도 산어귀에도 작은 공원에도 제자리를 지킨다. 매미는 더 넓고 더 높은 것을 추구하느라 변덕이 심한 인간을 어떻게 볼까. 관심도 없는지 숲속의 매미들은 날마다 사이좋게 떼창을 한다. 떼창은 거의 똑같이 시작하고, 일시에 뚝 끊기면서 악곡 마침표(fine)를 찍듯 정적이 흐른다. 여향은 없으나 옥타브가 고조될 때 절정을 이룬다.
매미 소리가 극에 달할 때 기온도 최고조로 올라가리라. 울음의 높낮이에 따라 강약이 달라진다. 그 소리가 소리를, 삶키고 다시 소리를 토해내고 또 삼킨다. 매미 소리만 그럴까. 건축공사장에서 동시다발로 들리는 각종 기계음과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도 소리를 삼키지 않는다면, 사람이 정작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할 테다. 반면에 소리 없는 세상은 더더욱 숨이 막힌다. 고요와 적요가 때론 필요하나 소리가 삶의 생동감이다. 적막함 속에서 외롭고 쓸쓸할 때가 더 많으니 말이다.
인생길이 고해라고 할 만큼 삶에 고통이 수반된다. 가끔 말 못할 일로 가슴 답답할 땐 힘을 다해 크게 소리치고 싶다. 그러나 매미처럼 목청 높인 소릴 내 뱉을 수 없는 것 또한 인생이다. 그저 소리를 삼키고 또 삼킬 따름이다. 매미는 소리치고 싶은 나를 대신하여 울어주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떼창을 듣고 있노라면 어지러운 세상사도 잠시 잊고, 내 안에 쌓인 울화도 사라진다.
매미가 자지러지게 울 때는 생명을 다한 형제를 떠나보낼 때의 슬픔 같고, 조금 낮은 울음은 새 생명 탄생을 축복하는 것 같다. 그래도 매미 울음이 시끄럽게 느껴질 때는 자연의 소리로 간주하면 속이 시원해진다. 여름의 전령사로, 대표자로 인식하게 되는 것도 그 이유다. 나무도 매미를 좋아하리라. 매미가 찾아오기 전엔 새가 나뭇가지를 언뜻언뜻 넘나들며 울어 주는 게 고작이지 않는가. 매미 노래는 자기네의 새로운 삶에 축제를 넘어 주야장천 한군데만 서있는, 나무에 보내는 심심한 위로송인지도 모른다.
짝짓기 한 뒤 수놈이 먼저 숨을 거두고, 암컷도 나무둥치와 가지에 알을 낳고 죽는다. 하여 매미를 두고 여름은 사랑의 계절, 죽음의 계절이라고 하고,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철저히 버려지는 계절이라고 한다. 아무튼 남겨진 그 알들이 애벌레가 되어 땅 밑 나무뿌리의 수액을 먹고 성장한다. 그것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신분상승할 날만 손꼽아 기다릴 테다. 매미들도 지상에서 누리게 될 꿈을 실현하기 위해 캄캄한 지하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으니까. 힘들여 얻은 땅 위의 삶이 바로 죽음 문턱이라는 것도 모르고.
사람도 고생 끝에 꿈을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넉넉지 않은 돈 때문에 못 해본 것들을 한껏 해보는 걸 소원으로 꼽는다. 그 소망을 목표로 온갖 아픔을 불사한다. 살림은 윤택해졌지만, 바랐던 삶을 누리기 전에 병이 생기기도, 급작스러운 사고로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사람처럼 매미들도 자기들 수명이 이토록 짧다는 것을 알지 못하리라. 세상 밖에 나가면 누리게 될 거라는 유토피아만 꿈꾸어 왔지 않았겠는가.
매미는 나비가 부럽지 않을까. 나비는 성충이 되는 기간이 길지 않은 데다 매미처럼 목 아프게 울지 않아도 된다. 철새처럼 대륙 간 초장거리를 저속 저고도로 비행한다. 얼마나 자유로운가. 꽃이 있는 산야를 날 때 하늘하늘한 춤사위와 여러 가지 빛깔로 사람 마음을 설레게도 한다. 나비는 우리에게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나비처럼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기에.
영역과 공간이 한정된 매미에 비해 나비는 대륙을 넘나들 만큼 광범위하다. 또 매미 집은 딱딱한 나무다. 나비 집은 천지에 쉴 수 있는 포근한 곳이 많다. 열악한 환경인 매미의 일생에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매미는 나비의 아름다움도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까. 애벌레로 힘겹게 한 올 한 올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서 오랫동안 내적 변화를 겪은 뒤 마침내 두 날개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게 된다는 것을.
매미떼가 조금 전보다 이구동성으로 더욱 크게 울어 댄다. 그 울음 소리가 소리를 삼키지만 듣는 귀가 앙앙거리면 여름이 깊어간다. 바야흐로 매미의 전성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