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둥 헛걸음이었다.
한껏 높아진 음성은 천장을 부딪치고도 부서지지 않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자 그 속으로 가라앉았다. 부엌 쪽으로 갈까 베란다 쪽으로 갈까 망설이는 사람처럼 거실 가운데서 서성댔다. 30년이 어디 짧은 시간인가.
동창의 목소리 하나로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이렇게도 빨리 오늘로 달려 나올 수 있는 묘한 일에 놀랐다. 처음엔 유선 전화선만큼의 길이로 다가오더니 이내 귀와 입의 길이만큼 가까워졌다. 그렇게 탄성 좋은 추억으로 가슴 속에 살아있었다가 잠시만 서로를 더듬으면 30년 전의 모습으로 만져지는 관계가 동창이었나 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창을 만나면 착각의 안경을 하나씩 쓰고는 "어머, 너 그때 모습 그대로다. 하나도 안 변했네" 할 수 있다.
30년 만에 동창을 만난다는 생각에 분주했다. '누구는 어찌 변했을까, 알아볼 수는 있을까' 하다가 결국 나를 거울 앞에 머물게 한 것은 '나는 어떤 여자일까' 라는 마음에 달린 무게추였다. 그러나 이번 모임은 반가움 그 자체일 뿐이니 부레같이 떠있는 반가움만 생각하기로 했다.
동창을 만나기 위해 잠시 호텔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여러 중년의 여자들을 보았다. 눈길을 한 번 줄 만큼 개성적이지도 않았고 또래보다 웃보여서 '아니겠지?'하며 지나쳤는데 동창회장 앞에서 만났을 때는 조심스레 들여다봐야 했다. 잠시, 아주 잠시 만에 누군 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느낀 순간, 내심 놀랐으면서도 곧 낯선 얼굴에서 30년 전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그대로네'라는 말이 진심으로 튀어 올라왔다. 기억된 형상은 시간 속에서나 뇌 속에서 늙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했고 그 기억을 현재의 근육과 이목구비 위에 오버랩하면 현재의 얼굴이 30년 전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현재와 기억이 맞닿을 수 있도록 조종한 마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창窓이었다. 동창同窓, 같은 창을 통해 미래를 바라본 친구들 앞으로 나는 준비된 운고를 들고 나갔다.
그리고 그 마술을 믿고 창窓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바쁘게 살았다. 여고의 기억을 쉽게 꺼내보지도 못할 만큼 바쁘게 살다가 마침내 꺼낼 수 있는 자리에 섰다.
이제 우리의 아이들은 그때의 우리 나이를 넘겨버렸고 우리는 많게만 생각되던 그때 스승님들의 나이를 넘겨버렸다. 우리는 우리의 나이가 적지 않은 나이라고 애써 알려주는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졸업 30년 만이라는 동창회가 우리의 창을 열어 준 것이다.
그때 우리는 착실했고, 총명했고, 순수했다. 등굣길 은행나무 줄지은 언덕길을 잰걸음으로 걷고 뛰며, 그 길을 빗자루로 쓸고 계신 교장 선생님을 보면서 우리는 건방을 배우지 않고 존경을 알았다. 점심시간 잔디밭에 앉아 과자 봉지에 손을 돌려가며 수다를 떨 때도, 방송실에서 흘러나온 음악도, 감미로웠다. 치마를 펄럭이며 먼지 폴폴 나게 추었던 점심시간의 포크댄스와 매달마다의 산행과 영화 관람, 그리고 예술제도 우리들의 감성을 다듬어 주었다. 매주 치른 월요고사와 복도에 나붙은 성적표도 우리를 찌들게 하지 않았고 우리들의 보물이 되었다.
앞으로 우린 조금 늙겠지만 더욱 아름답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몸은 조금씩 건강을 두려워하겠지만 우리의 마음은 더욱 순수해질 것이며, 나를 필요로 했던 가족이 나를 놓아주려 할 때 우리는 더욱 씩씩하게 자유를 느낄 것이다."
원고 낭송이 끝나자 친구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 박수를 쳤고 지나온 세월을 격려하듯 박수를 보냈다.
동창同窓 안으로 들어간 우리들은 그 시절에 입었던 감성의 옷을 입고 그때의 너를 얘기하고 '어머 내가 그랬니?"하며 서로를 확인했다.
시간이 흐르자 하나씩 둘씩 동창 밖으로 나와 개인이 끼워 넣은 창窓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30년의 시간이 그렇게 빨리 다가왔듯 반가움을 풀어내는 시간이란 것도 알고 보니 또 그렇게 긴 시간을 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너는 요즘 뭐 하니?" 서로 물었다.
아무도 너의 남편이 누구고 너의 애들은 어느 대학에 다니냐고 묻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묵직한 질문이었다. 우리가 무엇이 되어 살았든지 무엇을 위해서 살았는가는 묻지 않았다. 30년이라는 세월 안에 공통된 여자의 삶이 들어있었기에 생략한 것 같았다. '여고 때 너'는 '지금 어떤 여자'냐는 현주소를 묻고 이었다.
직장에 다니는 친구나 예술 활동을 하는 친구나 취미생활을 프로화 시켜가고 있는 친구들이나 명상이나 종교나 여행이나 봉사를 하고 있는 친구도 모두가 당당한 모습으로 현재를 대답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 그것이 요즘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당당한 대답이었다.
'그냥 집에 있어'라는 말은 내용이 초라한 대답이라기보다 표현에 당당함이 부족한 것일 뿐이었다.
'내가 누구였던가'를 생각하게 한 반가움의 끝에서 '지금 나는 누구인가'로 귀착되었다. 그것은 내가 여기 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앞으로 내가 찾아야 할 길이기도 했다.
'너 요즘 뭐 하니?'
그 말 속에 '나'라는 창窓이 또 하나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