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 강천

 

 

수국의 계절이다. 화원이든 공원이든 수국이 있는 곳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 붐빈다.

수국 열풍에 애먼 나도 덩달아 휩쓸리게 되었다. 심어 기르는 식물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내가 물가로 끌려가는 소처럼 수국 유람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어디선가 입소문을 듣고 온 동갑내기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다. ‘지금 못 보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쇠고삐 논리다. 따라나설 적에는 수국이 좋은 곳에서 차나 한잔 마시고 오려나 하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간여의 운전 끝에 도착한 민간 정원. 웬걸, 산등 하나를 통째로 개간해 수국을 심어놓고서 들머리에서는 떡하니 입장료까지 받아 챙긴다.

떨떠름한 내 심사와는 상관없이 수국은 절정을 맞은 듯 바라져 있다. 색으로 깔 맞춤한 무리가 있는가 하면 특이한 자태로 눈길을 사로잡는 녀석도 있다. 베르나, 핫레드, 얼리블루 하고많은 종류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다. 형태도 색깔도 내가 알던 수국과는 너무도 다른지라 되레 생경하다. 그래도 뭐 어떤가. 어차피 조작된 모양이고 색상일진대 보기 좋으면 그만인 거지. 바라보는 동반의 얼굴마다 수국보다 더 화사한 웃음꽃이 피었다.

그늘진 계곡 근처를 거닐다가 눈에 익은 꽃을 만났다. 산수국이다. 여기에 있는 모든 수국의 모태이자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꽃. 수국에 비하면 단출하게 생겼지만 여름 물소리와 어우러진 모양새가 천연덕스럽다. 반가운 마음에 산수국이 잘 내려다보이는 길섶 의자에 눌러앉았다. 조금 건너는 왁자한 분위기지만 이곳은 그나마 한산한 편이다. 볼거리가 그리 신통치 않은 탓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함지박만한 수국 송이와는 대조적으로 겨우 네댓 개의 헛꽃만 나풀거리고 있으니.

헛꽃, 꽃잎도 향기도 내세울 것 없는 산수국이 찾아낸 궁여지책. 꽃받침을 꽃잎처럼 보이게 만들어 매개충을 유인하려는 가짜 꽃이다. 토양 성분이 산성이면 푸르게, 알카리성일 때는 붉게 변하도록 양념까지 살짝 버무려 놓았다. 그뿐인가. 수정이 끝나면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살며시 돌아앉아 주는 팬 서비스까지. 저 지천으로 헤벌어진 수국은 산수국의 헛꽃만 따로 개량해서 만들어 놓은 모조품이다. 그러니 겉만 멀겋지 암술도, 수술도, 꽃잎도, 열매도 없다. 꽃처럼은 보이지만 꽃 구실을 못 하는 말 그대로 눈요기용일 뿐이다.

사람에게는 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제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성향이 있다지 않은가. 수국을 보며 무성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산수국의 양성화를 알아보는 사람도, 눈길은 죄다 변화무쌍한 헛꽃에 머문다. 이상할 일도 아니다. 그걸 보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참이니. 이 자리에서 진짜 꽃인지 가짜 꽃인지, 꽃잎인지 꽃받침인지 따위의 분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수국의 향연에 마음을 빼앗기며 그저 눈앞의 황홀을 즐기면 그만인 것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물이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때로는 물가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불길이 타오르는 궤적을 생각 없이 바라보는 것. 그냥 노래에 빠져들어 흥얼거리기도 하고, 드라마의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는 것. 나무 그늘에 앉아 매미 소리를 들려오는 대로 듣고, 숲길을 한가로이 걷는 것. 그 무심한 행위가 굽이진 삶의 주름을 펴주고 새로운 걸음을 위한 활력이 된다는 사실. 이 꽃길을 걷는 사람들 또한 그러한 마음이리라. ‘가짜에 속아서 헤실거리는 게 뭐가 그리 좋으냐’며 마땅찮은 얼굴로 나앉아 있는 나만 빼고는.

빅터 프랭클이 주장하는 유의미한 무의미가 아니다. 사유가 전제된 철학적 무의미도 아니다. 자각이나 해석이 배제된 정신적 해방 상태에 놓인 무의미라는 말이 맞지 않을까. 이런 무의미가 오히려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게 하여 몰입의 상태로 만든다. 다른 대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즐거운 상태. 놀이가 그렇고 좋아하는 것에 열중할 때가 그렇다. 피로도 잊고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는다. 마치 수국에 푹 빠져 무아지경을 오가는 저 동무들처럼.

의미 있는 행위를 위하여 자신을 강제하기보다는, 무의미하다 싶은 것에 맥락을 놓아보는 일. 이 단순한 무의미가 때로는 의미 있음 보다 더 유의미한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갑자기 모기떼가 달려든다 싶은 건, 별것도 아닌 일에 홀로 유난 떨지 말라는 일침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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