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의 길 / 김희자

 

수탉 홰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바닷가 구름 사이로 여명이 밝아온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동이 트는 초당을 오른다. 호젓한 초당 앞을 밝히는 불빛이 발길에 차이며 부서진다. 영남의 어느 땅에서 그리움을 품고 달려온 길. 세상을 생각하고 사람을 사랑했던 다산의 마음을 닮고자 나선 길이다.

초당에 이르는 길은 뿌리의 길이다. 수백 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땅 위로 드러나 있다. 이 나무와 저 나무의 가늘고 굵은 뿌리들이 저마다 가슴 서린 사연들처럼 서로서로 뒤엉켜 뻗어가고 있다. 지상으로 드러난 소나무의 뿌리들. 땅속에 숨기고 살아야 할 뿌리를 왜 지상으로 힘껏 뻗었을까? 뿌리를 밟지 않고서는 오르기 힘든 길이다. 순간, 땅속이 궁금하다. 서로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꼬여있을 뿌리의 세계가.

나뭇가지가 뻗쳐진 만큼 뿌리도 뻗는 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상 가지의 모습과 땅속 뿌리의 모습은 과연 같을까? 뿌리를 드러내고도 침묵하며 서 있는 나무. 저 깊은 침묵에 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침잠과 혹독한 다스림이 필요했을까. 나무는 땅속과 땅 위의 것들을 키우고 받들기 위해 밤낮없이 뒤척였을 것이다. 햇살은 가끔 땅속에서 이탈한 뿌리 위에 내려와 낮잠을 졸다 갔을 터이고. 뿌리의 근원을 찾다 눈높이를 더하니 소나무가 우뚝 서 있다. 그 모습은 풍상 거친 세월을 감내하며 사람의 뿌리가 되었던 다산 선생을 닮았다.

뿌리, 사람의 뿌리라는 말만 들어도 물기가 돌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둥글둥글한 가슴으로 목민의 근원이 되었던 다산 선생님. 모든 것은 백성을 살리기 위한 일이라 생각했고, 오직 백성을 위해,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고민했던 사람이었다. 늘 마음 속에 품었던 것은 애민 사상이었으니 선생은 분명 백성의 뿌리였다.

헌신의 절정은 사랑이라. 세상 모든 뿌리의 길은 헌신에서 시작되고 사랑으로 이어진다. 사랑 없인 갈 수 없는 것 또한 뿌리의 길이다. 그 사랑 무한하여 땅속의 뿌리가 땅 위까지 뻗은 것이 아닐까. 땅 위로 뻗어 상처 입은 뿌리를 보니 마치 땅 위로 흐르는 눈물덩이를 밟고 지나는 듯 애달프다. 아픈 것을 헤아릴 수 있음은 더 아픈 것을 견뎌본 사람, 상처를 입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끔찍함을.

몇 달 전, 나는 모 단체의 장을 맡았다. 뿌리째 흔들리기 직전인 단체를 맡고 보니 어깨가 무거웠다. 생각 차이로 다수가 떠난 자리는 황량했다. 남은 사람들은 순수했고 배움에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였다.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갈등이 이어졌다.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자면 나 또한 자유롭게 떠남이 이로웠지만 남아서 그들의 뿌리가 되기로 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뿌리를 내렸다. 하나 분열된 터에서 뿌리를 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흩어진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고 동요된 마음을 잠재워야 했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흔들림 없이 침묵하며 우뚝 서야 했다.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처럼 뿌리 깊은 나무는 침묵하며 버틴다.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불수록 쓰러지지 않으려고 더 깊은 뿌리를 내린다. 뿌리가 깊은 것은 많이 흔들려본 경험 덕분이다. 무수한 긁힘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척박한 땅일수록 휘고 뒤틀리며 자란다. 뿌리가 깊은 만큼 가지도 튼실하다. 실한 가지를 키우려면 뿌리부터 키워야 한다. 그래야 고운 꽃을 피우고 알찬 열매가 맺는다. 사람도 매한가지, 흔들림이 있어도 침묵하며 살아가야 존재할 수 있다. 존재의 뿌리여야 하는 길은…….

뿌리만큼 바쁘고 고뇌에 찬 것이 있을까? 땅 위로 뻗어 뿌리가 제아무리 꼬여 있어도 어찌 제 살점을 못 찾겠는가. 백성을 위해 자나 깨나 걱정하며 고립된 채 완강히 버텼던 다산 선생처럼 나 또한 남은 사람들을 위해 고뇌하며 인내한다. 상처 입은 뿌리를 밟고 지나자니 생각의 뿌리가 더욱더 깊어진다. 다산 선생의 깊은 정신은 그윽하게 남아 길 위에 머물러 있건만 나는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길을 가고 있어 쓸쓸하다.

험난한 길 더듬으며 발품 팔아 온 발바닥이 뿌리에 부딪혀 쓰라리다. 침묵하며 선 저 나무처럼 나는 지금 끝없는 바람의 뿌리를 움켜잡고 버티는 중이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나무의 슬픔 같아 소리 죽여 운다. 뿌리를 땅 위로 드러내고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나 역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꿈에 대한 그리움이 설사 허공 같더라도…….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되고자 했던 문장을 떠올리며 꽁꽁 여미어 둔 마음을 푼다.

한동안 허무해서 팬을 들지 못했다. 꿈마저 허기져 더러는 우울하고 슬픔의 눈물이 났다. 마음의 뒤란에 가꾸고 있는 것들도 빛을 잃어 희미해져 갔다. 때론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덧없고 무의미한 동요에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이 길을 떠올리곤 했다. 내가 정작 만난 세계는 서늘하고도 긴장된 날의 연속이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남은 자들을 지켜야 한다. 통한의 세월 속에서 침묵하며 버티다 보면 비로소 강한 뿌리도 생겨나리라.

구강포에 햇살이 퍼지자 말갛게 세수한 초당이 깨어난다. 다산 선생의 고뇌와 사색, 그리움이 함께했던 곳에서 내 존재를 확인하는 뿌리의 길을 찾는다. 누구도 그저 완성을 이루는 이는 없다. 자기 생각을 밀고 흔들림 없이 가는 것만이 청심 고지. 진선미의 길에 이를 수 있다. 세상의 수많은 유혹을 청심(淸心)으로 극복하려면 선생의 뜻을 배워 내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다시 먹을 갈아야 한다. 텅 비어 버린 꿈의 적소에서 희망의 빛을 다시 찾아 길을 가야 한다. 지금의 아픔이 뿌리 깊은 길이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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