뙤창 / 박동조뙤창 / 박동조

 

우리 집은 추석날과 설날이 가까워지면 방문 종이를 새로 발랐다. 할머니는 유독 큰방 문에만 손바닥 면적만큼 문종이를 오려내고 대신 뙤창을 붙였다. 부엌으로 통하는 샛문에도 마찬가지였다. 뙤창은 거듭 사용한 이력값을 하느라 얼룩덜룩했다. 새뜻한 문에 댄 헌 유리 조각은 비단옷에 덧댄 헝겊 같았다.

유리 조각 뙤창은 보기는 싫었지만 문을 열지 않고 밖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할머니는 이곳을 통하여 밖에 누가 왔는지, 식구들이 무얼 하는지를 살폈다. 뭐니 해도 이 뙤창이 하는 가장 큰 역할은 어머니가 부엌이나 마당에서 하는 일거수일투족을 방에서도 할머니가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귀찮지도 않은지 짬만 나면 구멍에다 눈을 맞추었다. 할머니가 뭐라 하시든 어머니는 “제가 잘못했어요.” 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무조건 고개를 숙이는 어머니를 편들어 할머니에게 맞대 놓고 대들기 일쑤였다. 그러다 어머니께 맞은 적도 많았다.

선머슴 같다는 꾸지람을 달고 살아야 하는 나로서는 뙤창이 눈엣가시 같았다. 뙤창만 아니라면 내가 부지깽이로 솥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한들 방 안에 계시는 할머니가 어찌 알겠는가 싶었다. 마당을 쓸다 빗자루를 발로 뻥 찬들 “가시가나 저래 가지고 어따 치워 먹노!” 같은 궃은 소리를 들을 리도 만무 했다. 어머니로부터 할머니께 대든다고 걸핏하면 고무신짝으로 등짝을 맞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한번은 나도 ‘할머니가 뭐 하시나?’ 방 안을 엿보고 싶은 생각에 마루에 엎디어 살살 기어가 뙤창에 눈을 대었다. 순간 나는 기절하는 줄 말았다. 문이 후다닥 열리면서 내 이마에서 불이 났음은 물론이다.

할머니의 눈동자가 아니어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피운 담배 연기로 방 안은 노상 어두침침했다. 환한 바깥에서 침침한 방 안이 잘 보일 리 없었다.

뙤창 밖으로 어머니가 움직이는 양을 지켜보던 할머니는 ‘암탉 걸음을 걷는다.’고 흉을 보았다. 열다섯 명이 넘는 가족을 건사하느라 쉴 틈이 없었던 어머니는 밤이 되면 에구, 허리야! 에구, 다리야! 에구 팔이야!" 하며 잠결에도 앓았다. 그러다 날이 밝으면 언제 앓았냐는 듯 몸을 일으켜 가족들의 식사 준비를 하고,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수발을 들었다.

몸이 아프니 동작이 굼뜰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나는 구박하는 할머니도 미웠지만 아프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 어머니가 더 미웠다. 그럴 때마다 애꿏은 뙤창에 도끼눈을 보냈다.

할머니는 다른 가족들의 티는 어물쩍 넘어가기도 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어머니에게서 찾아낸 티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어느 해의 제삿날이었다. 당시는 떡을 방앗간에 맡기지 않고 집에서 만들었다. 어머니가 인절미를 만들어 함지박에 담아 시렁에 얹으면서 옆에 서 있는 내게 한 개를 집어 주었다. 한 개를 더 집어 어머니의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번개같이 나타난 할머니가 어머니의 손을 덮쳤다. 떡은 멀리 마당으로 날아갔다.

“네가 왜 이걸 먹어!”

그 뒤로 어머니는 제사떡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구러 세월이 흘러 할머니의 눈초리에 힘이 빠지고부터 뙤창은 마당에 들어서는 외간 사람을 구별할 때만 간간이 쓰였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해부터였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우리 집에서 뙤창이 사라졌다. 뙤창이 사라질 즈음 어머니는 잔뿌리 무성한 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팔 남매의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일곱 자식을 두기까지 이미 무성해 버린 나무를 할머닌들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삼 년간을 자리보전하는 동안 나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혼자 할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내는 수발을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 휴가 때 가 보니 큰방 문 맨 아래 격자무늬 중 한 칸에 유리를 대어 놓은 뙤창이 보였다. 거동할 기력이 없는 할머니가 뙤창을 내었을 리는 만무했다. 까닭을 궁금해하는 내게 어머니는 뜻밖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자리에 눕고부터 오로지 어머니만 의지하려 한다고 했다. 네 명의 고모가 번갈아 문병을 오고 숙모들이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 주려고 수발을 자청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가 밭일을 가고 나면 할머니는 문까지 기어와 구멍을 뚫어 놓고 밖을 내다보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야가 와 이리 안 오노!”라는 말을 수없이 뇌며 기다릴 할머니가 어머니에겐 또 하나의 자식이었던 셈이다.

할머니에게 뙤창은 기다림의 도구가 되어 있었다. 감옥 같은 방 안에서 벗어나게 하는 통로기도 했다. 할머니는 뙤창을 통하여 어머니를 기다리고, 하늘과 구름과 해를 보았으리라. 때론 마당에 내리는 자글자글한 햇볕에 마음이 설레고, 건들거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산들바람에 부풀던 젊은 날의 치맛자락을 떠올렸을 것이다.

뙤창 속에 자신을 감추고 며느리의 티를 찾으려 바깥을 살폈던 시간들을 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기억했을까. 뙤창이 한 때는 자신의 힘이고 권력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나 했을까. 어쩌면 자신에게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것조차 할머니는 잊었을지 모른다.

이제나저제나 올까, 동공이 풀린 뜨물 같은 눈을 잔뜩 오므리고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뙤창 밖을 내다보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간혹 환영인 양 보인다. 할머니의 파삭한 모습 어디에도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기세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맞은 첫 명절에 뙤창은 우리 집에서 영원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