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나무 꽃 / 남태희
마을은 언제나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다. 바닥을 깨어 부수는 소리, 낡은 집들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인부들의 작업 지시 소리와 좁은 길목에서 비껴가는 차들의 경적까지 더해지면 소리는 햇살의 파편처럼 퍼져버린다. 누구나가 벗어날 수 없는 소리의 과잉 속에 노랗게 질려버린 주황빛 꽃이 애써 몸을 버티고 있다.
집에서 마을을 내다보면 오래된 마을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봄이면 도심 속 낡은 주택가에는 매화꽃 복사꽃이 피고 뒤이어 오동나무의 보랏빛이 시선을 끈다. 도심에서 오동나무 꽃이라니 처음에는 신기하기만 했는데 집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오동나무가 한두 그루가 아니다. 번식도 잘하고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는 오동나무의 특성 때문인지 보랏빛 향연이었다. 오동나무 꽃이 지자 뒤이어 향나무 꽃이 피었다.
향나무는 통닭집 담벼락에 끼워져 환풍구로 나오는 냄새를 고스란히 먹으며 자라고 있다. 수십 년의 세월 속에 나무 둥치는 버티어온 세월의 결기처럼 수결이 뚜렷하다. 향나무 푸른 잎에 드문드문 주홍빛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은 여름의 초입이었다. '향나무에 꽃이' 하고 자세히 바라보니 향나무와 한몸으로 능소화가 몸을 틀었다. 향나무를 잡고 오른 능소화는 향나무 꽃인지 능소화인지 헷갈리는 꽃을 피웠다. 멀리서 보면 둘은 제법 잘 어울렸다.
오래된 낡은 주택과 우뚝한 새 건물이 공존하는 곳이 지금 내 집과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중동, 어느 마을을 가나 중동은 마을의 처음의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처음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고 점점 외곽으로 커지면서 우동이 되고 좌동이 되듯이 한 중심이 되는 마을은 있기 마련이다. 마을에는 초고층의 건물과 단층, 2층의 낡은 주택들이 함께 하고 길에는 수억 원을 호가하는 외제 자동차와 손수레가 함께 이동한다. 여러 채의 집을 사들이기 위해 오는 고객과 나라에서 보조해주는 전세자금으로 거주할 집을 구하려고 발품을 파는 사람도 있다. 마을은 잠시도 머묾이 없이 변화하여 역동적이면서도 시끄럽고 번듯하면서도 구불구불하다. 창조와 파괴가 공존하는 도시는 날카롭지만, 곳곳의 나무들이 어김없이 계절마다 제철에 맞게 피워내는 꽃들과 푸름으로 가끔은 살만하다는 위안을 받고는 한다.
저녁에 마신 커피 탓에 새벽 3시가 넘은 시간 거실에 나와 창밖을 본다. 자동차의 흔적도 없는 시간, 먼 길 끝 가로등 아래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이 새벽 모두 잠든 밤 깨어있는 자는 무슨 사연인가 싶어 의자를 끌어다 앉아 길게 바라본다. 개업 집 풍선처럼 팔을 흔들더니 꽃집 안을 들여다보는 듯도 하다. 길가에 그늘막으로 대충 둘러두고 퇴근하는 꽃집이 걱정되어 더 자세히 바라보지만, 집에서 그곳은 너무나 멀다. '택시를 기다리나? 누구를 기다릴 시간은 아닌데.' 오지랖을 더하는 사이 누군가를 향해 다시 팔은 흔든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손수레를 끌며 한 여자가 지나간다. 익숙한 걸음새 작달막한 몸체를 보자 짐작이 간다. 그녀다.
그녀가 동동거리며 걷는다, 조금은 부족한 성장한 자식 둘을 품에 끼고 늙은 남편을 다독이며 살아가는 그녀는 능소화처럼 목을 빼고 항상 무언가를 찾고 있다. 남의 가게 앞에 놓인 폐지나 빈병을 찾고, 돈이 될 만한 것을 가져가라는 낯익은 얼굴의 부름에 반응하기 위해 기웃거린다. 그런 그녀의 아들이 이 밤, 돈이 될 만한 무언가를 점찍어 두고서 어머니를 부르는 듯하다. 저 손짓은 누군가가 오기 전, 빨리 오라는 조급함의 손짓이었다. 그녀가 최선을 다해 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당당하다. 아담한 몸에 안짱다리로 재바르게 걷는 모양새가 멀리서도 확연하다. 분리수거장 관리를 도와주면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챙겨간다. 작은 단지의 오피스텔이나 원룸은 따로 청소관리자를 두지 않고 묵시적으로 그녀가 재활용품을 정리하여 가져가는 것을 허용한 모양이다. 분리수거를 제대로 못 하면 쩌렁쩌렁하니 야단을 친다. 하지만 못마땅해 하는 이가 드물다. 네 식구가 개발이 아직 안 된 외벽에는 드문드문 이끼 낀 주택에 세 들어 산다. 낡은 주택에 세 들어 사는 그녀는 이른 새벽 온 식구와 폐지를 수거하기 위해 길을 나섰나 보다. 주택들이 하나 둘 허물어져 가는데 그녀의 마음인들 바쁘지 않을까. 이집마저 팔리고 나면 어디로 정처 없이 길을 나서야 하나, 혼자서 속을 끓이지는 않았을까. 향나무 꽃도 잠들은 밤 깨어있는 그들은 여전히 분주하다.
담장 안에 끼인 듯이 사는 향나무는 빌딩 숲에 섞여 있는 낮은 집과 닮았다. 보잘것없는 향나무를 부여잡고 올라 꽃빛마저 누런 듯 주홍빛이 바랜 능소화는 키 작은 그녀 같아 보인다. 그녀에게는 좁고 낮은 낡은 집이 안식처이다. 오래된 집은 늙은 향나무처럼 능소화 그녀 식구를 보듬는다. 갈 곳 없고 버틸 곳 없는 그녀가 적은 돈으로 세를 살 수 있는 유일한 집이다. 통닭집 기름 냄새를 고스란히 맡으며 버티는 향나무처럼 곰팡이 끼고 이끼가 끼어가는 집일지라도 그녀는 당분간 이곳을 떠날 수 없다. 이곳보다 더 싼 달세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갈퀴손으로 새벽잠을 내치면서 온 가족이 매여 있는 이유인지 모른다.
마을이 천천히 변화해가기를 감히 바라본다. 속속들이 사정을 알 수야 없지만 개발이니 보상이니 하는 낱말들이 하나도 상관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개발은 보금자리를 잃는 일일 뿐이다. 어떤 이는 허물어지는 집으로 돈을 벌지만 누군가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방망이질한다. 그 한가운데서 양쪽의 모두를 바라보는 시선이 언제나 흔들린다.
향나무 꽃은 여름이 다 가도록 꽃을 피워낸다. 길가의 먼지를 뒤집어쓰고도 의연하게 제 몫을 다한다. 기름내를 맡고도 버티어 주는 향나무도 꽃을 피워내는 능소화도 눈물겹도록 지극하다. 늦가을 오동나무 이파리가 소리 내어 구르는 날까지 집은 팔리지 않고 버티어 낼까. 아니 봄까지라도 버티어준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