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가 익어간다 / 최영애

 

나는 싱그러운 초록 잎을 보면 사족을 못 쓴다. 거실 앞 베란다에는 반려 식물이 많다. 나무들을 바라보면 어느 짙은 푸른 숲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요즘 얄궂은 환경 탓으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화분에서 자라는 작은 나무지만 푸른 잎을 보는 것만으로 생기를 얻고 기운을 차리게 된다.

 

제법 짙고 큰 잎을 달고 있는 비파나무 앞에 섰다. 오래전 친구가 건네준 비파를 먹고 뱉은 씨앗을 무심하게 화분에 던져놓았다. 그랬던 씨가 발아되어 십수 년을 자랐다. 그 비파나무가 삼 년째 꽃을 피운다. 그러나 출산할 수 없는 석녀처럼 꽃은 피우지만 열매를 달지는 못한다. 화분에서 자라는 탓으로 열매까지는 여력이 되지 못하나 보다. 더는 욕심부리지 않는다. 초록 잎을 볼 수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베란다에서 나무가 자라기란 쉽지 않다. 청량한 자연을 누려보지도 못한다. 내리는 비에 단 한 번 흠뻑 젖어 본 적도 없었다.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나는 간혹 분갈이나 해주고 한 번씩 물로 추겨주었을 뿐이다. 그래도 모질게 오늘까지 생명을 유지하며 나와 같이해 준 애완식물들이다.

 

나는 어떤 나무보다 비파나무에 관심이 간다. 옛날에는 귀했던 나무가 요즘은 관상수나 정원수로 심어져 흔하게 보게 된다. 특히 비파는 약용작물로 뿌리, 꽃, 잎, 씨,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게 없어 농가 소득으로 재배를 하는 농장이 늘어간다고 한다. 비파나무가 있는 집에는 환자가 없다는 옛말도 있다지만 나는 그런 높은 약성 따위는 따지고 싶지 않다. 내가 유독 반가운 것은 어릴 적 우리 집 비파나무가 남겨준 추억 때문이다.

 

고향 집에는 다른 집에 없는 과실나무가 많았다. 아버지는 일찍 떠날 것을 짐작했는지 아니면 생각이 앞선 것인지 모르겠지만 과실수를 심어 녹지를 만들었다. 집을 둘러싸고 커다란 유자나무, 비파, 여러 종류 감나무, 울타리에 줄기를 뻗어가는 청포도, 바라만 봐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살구나무, 석류와 배나무, 박달나무, 대추나무, 심지어 유난히 굵직한 검은 오디가 열리는 뽕나무까지 있었다. 계절에 맞춰 따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열매는 아버지가 외출했다 사다 주는 선물 같은 것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있는 친구들이 먹을 수 없는 과일 맛이 아버지가 곁에 없다는 서러움까지 지워주었지 싶다.

 

양지바른 돌담에 기대선 두 그루 나무였다. 유일하게 우리 집에만 있었던 비파나무다. 겨울 칼바람에도 하얀 꽃을 풍성하게 피웠다. 꽃이 귀한 철이라 벌떼들이 서로 꽃을 차지하려 윙윙거리며 다툼 소리도 치열했다. 솜털이 뽀송뽀송한 작은 열매를 달고 시린 겨울을 견뎌내었다. 보리가 누렇게 익는 오월이면 초록 잎사귀 사이로 노란 열매가 익어간다. 마치 황금빛 열매를 단 나무가 큰 왕관처럼 보인다. 비파는 송이도 유난히 풍성하고 씨알도 굵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며 달짝지근한 입맛도 다시게 했을 것이다. 당연히 처녀와 총각들의 눈도장이 찍혀 밤의 거사로 여러 차례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 귀한 비파를 원 없이 먹었다. 껍질을 까서 베어 물면 단물이 입안 가득 고여 아무리 따 먹어도 물리질 않았다. 그러다 배가 부르면 높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먼 훗날 꿈을 그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 싶다. 지금도 어디 어느 곳에서나 비파나무를 보게 되면 남다른 반가움이 인다.

 

아들 화실에도 남편이 키우던 비파나무가 있었다. 너무 예쁘게 자라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나무가 주인을 잃어 관심을 받지 못하니 가냘프게 야위어졌다. 지난해 잘 키워볼 요량으로 집 베란다에 옮겨왔다. 올겨울에도 먼저 자리하고 있던 비파나무가 몇 송이 꽃을 피웠다. 옮겨온 작은 나무까지 덩달아 꽃을 피우는 게 아닌가. 물론 꽃으로 끝내리라 짐작했다.

 

겨울의 중심인 세찬 날이다. 언뜻 다른 나뭇잎에 가려진 초록 열매를 본 것이다. 달랑 두 잎을 달고 있는 앙상한 가지 끝에 네 개의 비파가 열렸다. 저 여린 나무가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고 경이로운 마음마저 든다. 날마다 눈길은 온통 베란다 비파나무로 향한다. 내 염려와 달리 눈에 띄게 열매의 몸피를 불려가고 있다. 고향 비파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열매를 키워내는 나무가 감동을 더한다. 단지 초록 잎을 원했을 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비파가 익을 계절은 아니다.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도 코끝이 시리다. 남향 베란다 유리문에 햇살이 반사되어 따스한 기온에 비파나무가 착각했나 보다. 그동안 짙은 초록색으로 튼실하게 크던 열매가 점점 노란색으로 바래진다. 작은 나무의 능력은 끝이 없다. 용을 써 기어코 열매의 완성을 나에게 보여주려 한다.

 

어쩜 나무가 내 삶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 다시 글을 써보는 것이 어때?" 그의 의중대로 생활인으로 접어두었던 꿈을 펼쳐보기로 했다. 창작을 전공했지만 오랫동안 접어두었기에 무뎌진 감성으로는 어설프고 서툴기만 했다. 내가 생각한 문학이란 꿈꾸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일찍 문단에서 활동하는 기성작가들이 펼쳐내는 작품에 주눅 들곤 했다. 내 창작의 능력으로는 감히 그려낼 수도 상상할수도 없다. 더구나 소심한 성격은 문장도 과감하게 밀고 가지 못하니 능력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그러나 곁에서 잘한다고 추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쉽게 발을 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저 문학 언저리에서 누가 알아주든 상관하지 않고 글쓰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베란다에서 비파나무가 주어진 조건은 없어도 악착같이 열매를 키우듯이. 그랬던 나도 큰 에세이문학공모전에 멋진 결과를 얻었다. 첫 수필집 발간으로 문학상을 받는 영광도 누렸다. 지난 연말에는 두 번째 책도 발간했다. 비파나무가 열매를 달 듯 내 글쓰기도 더 실속 있는 야문 열매를 맺어가고 싶다.

 

노란색으로 비파가 익어간다. 먼 곳에서 전해주는 따뜻한 마음이라 여긴다. 문학의 길을 걸으며 남은 세상 잘 견뎌내라고 나에게만 전해주는 겨울 선물 같은 것. 열매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련해진다.

 

겨울, 베란다에 노랗게 비파가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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