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를 넘다 / 배영주
식당 테이블 위에 가방을 풀썩 던져 놓는다. "물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앞치마 있어요?"라며 목소리가 높다. 직원이 음식을 얌전히 그녀의 테이블 위에 놓자마자 "김치나 깍두기 있어요?"하고 주인을 부른다. 자장면을 먹고 있는 내 뒤통수가 왠지 근질근질하다. "자장면 한 그릇에 저리 까탈을 부려야 하나"라고 속으로 웅얼거리며 뒤를 돌아보니 얼굴이 뽀얀 중년 여성이다.
한때 금융기관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중국집에서 본 중년 여성과 흡사하게 닮은 어느 여성 고객이 오버랩된다. 그 여성 고객의 남편은 고위 공무원이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아리따운 애인을 작은 마누라로 두는 바람에 이혼했단다. 위자료는 넉넉히 받았지만, 정신적 충격을 받아 더러 횡설수설하며 자기만의 울 속에 갇혀 속박된 여인으로 비쳐 보였다. 텔러인 나에게조차 황당한 주문을 하곤 했다. 예치한 돈의 이자를 수표로 받아 가면서 "내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 수표 분실 신고 걸어 줘요"라고 냉담한 서울 어투로 내뱉고는 유유히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밝은 미소로 그녀를 안심시키고는 분실 신고 접수는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깐깐한 성격을 지닌 남성 고객도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점잖게 보였지만 내 앞에 올 때마다 통장과 도장을 휙 내던지는 통에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람이 동물적 유전이 남아있어 때론 사나운 본성이 으르렁댈지라도 기본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편해지고자 일찍이 나는 이 말을 생활 속에서 은근슬쩍 애용해온 장본인이다. 그 까탈스러운 남성 고객도 어쩌면 그만의 울 속에 갇힌 외로운 존재였으리라. 어느 날엔가 퉁명한 그 고객에게 "와이셔츠 색이 참 곱네요. 어디서 사셨어요?"라고 말을 건네자, "아~ 이거요? 우리 마누라가 백화점에서 골라준 겁니다."라고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분은 내가 지점을 옮겨 다닐 때마다 나를 찾아오는 우수 고객이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깊은 상심의 세계 속에서 빗장을 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나도 나만의 장벽을 치고 나만의 울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보따리를 싸 야반도주를 감행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지자 나는 어린 나이에 아이가 없던 안동 권씨 가문의 종갓집 양녀로 살게 되었다. 할머니와 나, 그리고 권씨 가문의 작은댁 아들도 양자로 들어와 함께 살았다. 70년대 후반, 그때 젊은이들은 농촌을 등지고 도시를 벗어나는 경우가 빈번했다. 경북 안동 지방의 젊은이들은 대체로 대구나 구미로 가서 공장에 다니거나 운전을 하여 터전을 잡았고 더러는 서울로 가기도 했다. 오빠도 유행에 휩쓸려 서울로 이사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빠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하겠다던 계획이 일 년 정도 늦어졌다. 나는 그 일 년을 들과 산에서 혼자만의 들꽃 울타리를 만들어 놀며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막상 서울로 이사 간 오빠는 "나는 너를 학교에 보낼 능력이 없데이. 아부지한테 가서 공부 열심히 하거래이."라며 내 희망을 꺾어버렸다. 결국 가족이 사는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언니, 오빠, 막내인 나,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의 동생들, 우리는 밭이 다르다. 내가 없는 세월 동안 다른 밭에서 아버지는 큰 농사를 일구셨다. 산골짝에서 천방지축 온 산천을 헤집고 다니던 나로서는 복작대는 일곱 명의 낯선 형제들 속에서 견디기 어려웠다. 내려온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어 가출을 했다. 답답한 울타리를 벗어나 야반도주하던 그 새벽 공기는 얼마나 상쾌한 자유였던가! 그러나 애지중지 날 길러준 할머니와 재회했다는 기쁨도 잠시.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또다시 탈출을 감행하자 아버지는 나를 대구의 작은 고모 댁에 잠시 맡겼다. 혼자 살고 있던 고모가 낮에 일하러 가고 나면 나는 할 일이 없었다. 노처녀인 고모는 책을 좋아했던지 보라색 양장으로 된 동서양 고전과 문학책을 가득 사모아 두었다. 다행히 그때가 책 울타리 안에 갇힐 좋은 기회였고 지금까지도 책 나부랭이를 끼고 사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불행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내겐 삼 년이라는 중학교 과정이 없다. 세 번의 탈출로 학교 갈 시기를 놓쳤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영원히 함께하지 못했다. 한창 푸르러야 할 시기에 나는 마치 빗속에 떨고 있는 작은 새처럼 외로웠다. 그러나 청소년기의 불행과 이런저런 경험은 상처를 단단히 아물게 하는 쓴 약이 되어 주었다.
바쁜 생활의 연속이다. 그러나 삭막해져 가는 마음에도 발길을 멈추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연두색 물결 사이로 다투어 피어있는 발그레한 꽃들의 미소엔 홀딱 반하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길을 걷는다. 저 울타리 너머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