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의자 하나 / 장미숙
아파트 화단 느티나무 아래 낡은 의자 하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나무 그림자가 의자 옆에 쪼그려 앉은 저물녘, 갈 길이 바쁜 해는 주섬주섬 어둠의 옷을 입는다. 너덜너덜한 행색으로 의자는 오늘도 밤을 새울 모양인가 보다. 언제 적 입은 것일까. 바짓가랑이는 해지고 빛도 바래 후줄근하다. 안쪽도 올이 풀리기는 마찬가지, 해진 옷 틈으로 자잘한 흉터들이 보인다. 의자는 자꾸 옷을 여미지만 메마른 살갗만 더 드러난다.
쭈글쭈글해진 피부는 팔팔했던 날을 추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살갗에 버짐이 생기고 딱지가 앉고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무한한 쉼을 주었을 의자다. 음료가 쏟아진 흔적이 나뭇결 사이에서 시들해져 가고 무료한 펜으로 새긴 낙서도 희미한 색으로 남았다. 온기를 가진 존재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비바람도 의자의 등에 기대 잠들었을 터이다.
나붓나붓 휘날리던 봄꽃이 의자의 어깨 위에서 뛰어놀 때는 사뭇 평안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러다가 여름의 장맛비에 등을 세차게 얻어맞으면서 굳은살이 박이기도 했을 테다. 펄펄 끓어오르는 햇볕이 내리쬘 때는 나무 아래로 숨어들고 싶었을 시간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쉼을 주고 평안을 안겨주기 위해 그 자리를 지켰다. 자신의 몸이 낡고 쇠약해가는 것에 아랑곳없이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을 의자의 생을 바라본다. 그 남루한 모습 위로 겹치는 한 사람이 있다. 고향에 홀로 계신 친정엄마다.
내게 엄마는 늘 그랬지만 요즘 들어 더 가슴에 얹힌다. 엄마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늘 자식들 걱정이 앞섰으니 당신의 인생이란 게 있기나 했을까. 엊그제도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야 다 살았으니 이제 바랄 게 없다.” 엄마의 삶은 순간순간이 희생이었는데 어찌 바랄 게 없겠는가. 그저 이제는 체념하고 모든 걸 받아들이려는 것뿐이다. 그걸 알기에 맘이 편치 않다.
구순이 가깝지만, 엄마는 맑은 정신을 갖고 계신다. 아직도 자식들 생일은 물론 손주들 생일까지 꼽을 만큼 기억력도 좋다. 해마다 봄이 되면 된장을 담그고 장을 익힌다. 거친 손이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엄마에게 세상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다. 시력을 잃어가는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에 우렁우렁 찬바람이 인다.
젊었던 엄마에게 땅은 모든 것이었다. 아버지 병으로 기울어져 가는 가세를 지키느라 온종일 흙을 벗하며 사셨다.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날에도 찬바람 이는 겨울날에도 엄마는 쉬지 않았다. 거름 얹은 지게를 지고 논으로 밭으로 다니던 그 고된 여정을 기억한다. 땡볕이 작열하던 날,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던 엄마의 모습도 생생하다. 땀범벅이 된 고단한 얼굴, 하지만 젊었을 때는 그게 고생인 줄도 모르셨단다. 한 집안을 지키기 위해 제물처럼 당신의 몸을 희생한 엄마는 이제 노년의 그늘에서 외로움을 벗 삼아 하루를 시침질한다.
자식들은 일 년에 몇 번 들여다보는 것으로 도리를 다한다. 그게 마음에 걸려 엄마께 도시 생활을 권해보지만, 고향을 떠날 생각 없다고 귀를 막아버린다. 엄마는 당신이 온몸으로 살아온 곳에서 영혼까지 함께하기를 원한다. 손발의 힘이, 그리고 희미한 빛이 다할 때까지 집을 지키겠다는 엄마를 생각하면 눈앞이 흐려진다.
당신이 평생을 쓸고 다듬어온 마당에서 동그랗게 등을 말고 계실 엄마는 이제 아이처럼 작아졌다. 마당의 낡아가는 평상과 함께 엄마의 삶에도 물기가 빠져버렸다. 삐걱거리는 평상에 앉아 동구 밖을 바라보고 계실 그 허허로운 일상을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늙음은 찾아오는 것이고 피해갈 수도 없다. 하지만 때로 늙음은 너무 큰 슬픔을 잉태한다. 엄마의 빛이 사라지기 전에 웃은 모습으로 마주하는 날, 아이처럼 작아진 엄마를 꼭 안아드리고 싶다.
엷은 봄 햇볕 아래 남루한 낡은 의자가 오늘도 발걸음을 붙든다. 엄마의 고단한 생이 의자에 생생한 활자로 새겨진다.
<삶의 온기 2023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