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이야기 / 홍정미 - 제1회 아주경제 보훈 신춘문예 당선작

 

 

계단을 올랐다. 자줏빛 치맛자락을 여미며 오르던 가파른 길이다. 회색 벽돌의 근대 서양식 건물 앞에 섰다. 쨍한 오월 한 날, 새들이 노래한다. 시간은 흘러도 공간은 그대로다. 도시의 소음을 삼키는 초록이 사방을 에워싼다. 이어지는 길을 따라 언덕을 걷는다.

육각형의 각점마다 가시 돋친 촘촘한 잎새 사이로, 은은한 향의 흰 꽃이 함함하다. 가을이면 앵두처럼 둥글고 시붉은 열매를 맺는다. 호랑가시나무다. 이 길은 호랑가시나무 언덕이다. 사백여 년을 살며 도시의 역사를 굽어보던 호랑가시나무 언덕을 지나, 다시 학교 역사관 쪽으로 걸었다. 척박한 숲, 돌무덤이 있던 풍장터, 여우가 출몰한다고 해서 여우 골이라 불린, 숲가 언덕에 지은 학교다. 이 도시 최초의 여학교다.

기미년 3월 10일 새벽, 교사와 학생들은, 고종의 인산일에 입었던 소복 치마를 찢어, 학교 지하에서 태극기를 만든다. 거사 날 아침, 태극기를 들고 천변으로 뛰어나온 교사와 육십여 명의 전교생은, 부동교 앞 작은 장터를 지나, 경찰서 쪽으로 향한다. 이때 왜경은,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윤혈녀학생의 왼팔을, 칼로 내리친다. 굴복하지 않고 다시 오른팔로 태극기를 쥔 그녀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체포된다.

대강당 쪽으로 갔다. 만세운동 기념 동상이 있다. 결곡한 표정의 청동상 학생들이 화강암 석탑 위에서 외친다. 태극기를 들고 앞선 학생이 “가자!”라고 하자, 뒤따르는 학생들이 “같이 가자!”라며 호응한다. 이 동상은 기미년 당시 만세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교사와 학생 스물세 명을 추모하는 동상이다. 오래전 교정을 걷던 계절을 떠올렸다. 꿈도 의지도 불투명해 주눅 든 나였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저항하던, 거인 같은 선배의 동상 앞에서, 나는 한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한 소녀가 보인다. 자목련과 백목련, 은단풍 나무와 느티나무가 낭창하던 뜰, 붉은 벽돌 건물과 초록 지붕의 교정이 있다.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잿빛 벽돌 건물에 이국적인 박공을 두른 건물이 있다. 가끔 재학생들은 이 건 물에서 채플 수업을 했다.

아담한 현관 포치에 들어서, 2층 나무계단을 오른다. 열린 창문으로 놀러 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쉼 없이 노래하는 새소리에 섞여 가분가분 들어오는 나비, 이름 모르는 벌레와, 포르르 날며 허둥대다 꽁무니를 빼는 어린 새도 보았다. 모두 탄성을 지르다가 곧 수업을 멈추었다. 잠시 사람 사이의 정적이 흘렀다.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공간이 있다.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은 보이는 일, 단언하기 힘든 감각의 시간이 한 생에 어떤 식으로 머무는지를 깨닫는다. 세월의 더께 위에,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상 앞에 섰다.

바다 건너온 선교사들은, 버려진 가난한 땅 여우 골에 정착했다.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복음을 전했다. 가족도 외면하는 나환자를 품고, 열사를 지원했다. 학생을 광장으로 부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사랑과 인내는, 교사와 학생의 신념에 불을 지폈다. “자유 없는 속박에 사느니보다, 사슬을 끊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네!”라며 태극기를 품고 장터를 향했다.

푸른 담쟁이덩굴이 흐드러진 청라언덕에는, 구십 계단이 있다. 언덕에서 부르르 일어서던 함성이 들리는듯하다. 만세를 외치며, 식민에 대항한 장소다. 무리와 공간은 다르지만,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독립을 바라며 ‘우리’가 되었던 공공의 선을 본다.

어느 소설에는 항쟁 이후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며 도청에 따진 학생이 있다. 실화에 근거한 글이라, 그녀가 언덕 쪽에서 걸어온 사실을 나는 안다. 다양하게 시대적 양심을 투영했던 젊은 혼들을 본다.

세상은 변한다. 같은 소망도 얼굴을 바꾸며 말한다. 계단을 타고 다시 학교 역사관 쪽으로 걷는다. 오르는 길은 심장이 뛴다. 언덕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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