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술령의 봄 / 윤미영
매화 꽃잎이 하르르 흩날려 서러운 풍경화가 되던 날. 야트막한 산행을 했다. 3월 말 때늦게 내린 눈은 무릎을 덮을 지경이었다. 하얀 눈길은 굽이마다 역사의 뒤안길로 끝없이 이어진다. 우둔거리는 마음으로 "치술령鵄述嶺"으로 발을 디딘다.
푹푹 빠지는 눈밭이다. 발도 무릎도 이내 눈의 물기가 스며든다. 한 발 두 발을 내딛기 쉽지 않은 이 길을 누군가는 수없이 걸었으리라. 갈참나무가 깔린 길은 미끄럽기도 한데 버선발이 찢어지도록 걸었으리라. 그냥 걷기도 힘든 이 길을. 이십여 분 걸었을까. '치술령' 이라고 아로새겨진 작은 입석이 소연하게 반겨준다. 치鵄는 솔개 등의 새를, 술述은 수리, 새가 사는 높은 산을 의미한다. 무릎 높이의 입석은 눈을 등짐처럼 가득 지고 있다. 떨어내 주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가 허허한 마음을 채우고자 눈이라도 덮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다.
죽음으로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는 쉽지 않다. 목숨을 초개 같이 나라에 바친 그는 요즘 같은 난세에 기억해 보고 싶은 인물이다. 그가 왜국(일본)에서 죽음을 맞기까지 신라로의 귀국을 얼마나 절절이 원했는지 모르는 이는 없을 터. 끝내 돌아올 수 없었던 그의 피맺힌 바램은 눈처럼 마음을 덮고 또 덮었으리라. 그가 박제상이다. 그를 따라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5세기 초 신라는 약소국이라 주변국으로 부터 외침이 잦았다. 그래서 늘 조공을 바치거나 볼모로 보내야 하는 형편이었다. 눌지왕이 즉위하고 얼마 후, 아버지 내물왕 때 고구려에 보내진 동생 '복호'와 왜국의 '미사흔' 생각에 주야장천 수심에 차 있었다. 이에 왕은 신하들이 천거한 박제상으로 하여금 두 왕제를 구해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는 당시 삽량주(지금의 양산)의 수령이었다. 다스리는 지역은 주변 국가와 왜국까지 얽힌 분쟁지역이었다. 국제정세에 능통한 지식을 바탕으로 대외적인 뛰어난 지략가였고, 사람을 보는 안목과 언변도 지녔다. 눌지왕은 내심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리라 믿었다. 그는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를 무사히 구출해 오는 공을 세웠다. 그에 힘입어 한달음에 왜국으로 가는 뱃길에 올라 미사흔도 구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탈출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위험천만한 사지에 묶인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화려했던 자신의 언변이 올무가 되어 자신의 운명을 바꾸리란 것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남편 박제상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이는 부인이다. 부인은 남편이 신라를 떠난다는 소식을 막 접하고 버선발로 뛰어나갔으리라. 쫓아갔으나 남편이 탄 배는 수평선 가까이 이미 꼬리를 감춘 후였다. 부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파도에 묻혀 어디 들렸겠는가. 들린들 나라의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그가 들으려 하였을까.
얼마 후, 그가 왜국의 신하가 되었다는 소문이 신라를 애돌았다. 부인은 아연실색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없을 거라고 울분을 삼켜야만 했다. 소문의 진상은 그 누구도 알 리 없었다. 부인은 먼 빛으로라도 왜국이 보일 듯한 치술령에 올라와 치성을 들였다. 소문이 소문이기를, 남편만 돌아오게 해 달라고 날마다 밤마다 올랐던 길은 숨이 턱에 걸릴 만큼의 비탈길이다. 서서히 곡기마저 끊지 않았던가. 고무신에 버선발로 수십 번을 미끄러지며 발끝이 터지도록 오르고 올랐던 길이다. 나도 그 길을 따라 오르는데 목이 간간이 메였다.
일화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박제상의 충성심에 감복한 왜국의 왕이 자신의 신하로 삼기 위한 회유책이었는데 신라에 와전되었던 것이다. 훗날 오해가 풀려서 신라의 왕은 박제상을 대아찬에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으로 책봉하였으며, 둘째 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켜 때늦은 보은을 했다.
울주 마을 입구에는 <박제상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그와 부인과 두 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제례를 올린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그들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치산서원을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선다. 지역의 대표적인 목곽묘의 제작과정을 복원, 전시하고 있다. 천석 군 정도는 되어야 곽을 만들 수 있었을 것 같다. 중간에 시신을 누이고 그의 유품들을 함께 묻었다. 아마 박제상의 시신이라도 고향으로 돌아왔다면 목곽에 편히 안치되고도 남았으리라.
마당 한 녘에는 "삼모녀상"도 자리 잡고 있다. 기념관을 바라보고 서 있다. 남편을 기다린 부인,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딸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어 보는 이마다 눈시울이 젖는 곳이다.
치술신모를 위한 제사를 모실 때 제의가인 '치술령가'가 불린다고 한다. 훗날 김종직이 울주에 벼슬살이 하러 내려왔다가 한역했다는 이 노래에는 부인의 애타는 슬픔이 잘 담겨 있다. "치술령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하늘에 닿은 물결 가없네. 낭군이 가실 때 손만 흔들더니 살았는가 죽었는가. 죽은들 산들 어찌 서로 만날 때 있으랴…" 부인은 남편이 꿈에라도 한번 다녀가길 바랬다. 그러던 어느 날 주문 같은 기도의 끝자락에 남편의 목소리를 환청이라도 들었던가. 그 날로 부인은 자유로운 혼이 되어 동해바다로 날아갔는지 모르겠다.
치술령 아래로 나있는 나무계단을 몇 개 내려선다. 어른 열 서넛은 앉을 만한 하야말쑥한 반석이 눈에 뛴다. 부인은 하세월 기다림에 지쳐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 부인의 넋은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에 담근 채 하염없이 서 있다. 그 위로 찬서리 내리고 바람이 수없이 지나고 눈이 오고… 무상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치술신모가 되었다는 전설은 애잔하게 가슴을 울린다.
박제상 그의 육신도 왜국의 땅에서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원혼이라도 바람의 어깨를 빌어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겠는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그리움은 왜국의 이름모를 바닷가 어느 언덕에서 홀홀히 망부석望婦石이 되었을지 모른다.
매화의 아늘거리는 자태가 봄 길을 연다. 모진 역사 곁에서 매화 향은 짙기도 하다. 하얀 향이 아득한 이천 년 전 하늘로 피어오른다. 매화의 꽃말처럼 선비의 품격과 절개가 역사의 뒤안길에서 서러웠던 그와 부인의 넋을 위로라도 하는 듯하다. 눈발이 날리던 치술령에도 어느덧 봄이 너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