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담배 / 이경은
학림다방 의자에 앉자마자 울기 시작한다. 크게 소리 내어 울지 않는데도 왠지 울음소리에 슬픔이 그득하고 사랑의 상처가 느껴진다. 그 쓰라림이 전파처럼 전달된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는다. 잠시 후, 여자가 코트를 벗자 샛노란 반팔 티셔츠의 모습이 나온다. 한겨울인데, 저렇게 멋진 여자라니…. 그러더니 담배를 꺼내 한 대를 핀다. 아주 시원하고 길게-. 속 안의 모든 감정을 독한 담배 연기로 훑어 내려 결결이 헤진 내장에 차라리 통증이라도 주는 듯이. 상처들이 연기에 닿아 다시 한번 거칠게 쓸리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담배’라는 대상을 미적인 시선으로 기억하는 첫 장면이다.
그녀와 담배, 참으로 강렬했다.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라는 영화를 보다가 파묻혀 있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이 특이한 이름의 영화는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필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11가지 코미디이다. 출연 자체만으로 화제를 모은 스타들이 나오는데, 좁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담배를 계속 피우며 커피를 마신다. 이런 순간, 건강을 따지고 들면 대책이 없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 대화들이 지적이고 매력적이며 때로는 수다스럽고 엉뚱하기까지 하다. 때론 ‘무슨 대화가 이래? 너무 시시한 거 아냐?’ 하는 생각마저 든다.
농담. 시시하고 맥없지만, 그래서 슬쩍 재미있는.
그 공간은 나른하고 지루한 일상에 달콤한 농담처럼 모든 것을 허용받는 느낌이 있다. 뭐든 해도 좋아, 라는 말을 들을 때의 그 포근한 행복. 금지된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유의 기분을 실컷 느낄 수 있다. 팍팍한 삶에 쉼표를 건네주는 이 실험적인 영화는 웰 메이드 영화의 완벽함에 지친 이들에겐 숨구멍이다. 원석의 거친 아름다움과 순수함이 사람들의 숨결을 틔워 준다. 한 방울의 물이 메마른 영혼에 떨어지는 기분이랄까.
커피, 하면 나는 제일 먼저 이효석이 생각난다. 낙엽 타는 냄새에서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던 그 구절, 은 어느 표현보다 확고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낙엽과 커피가, ‘타는’과 ‘볶아낸’이 하나로 뒤섞여 새로운 냄새를 끄집어낸다. 낙엽은 땅에 떨어져 제 몸을 다 불태우면서도 커피의 향을 찾아내 주고, 커피는 떨어진 잎이 마지막으로 연소되는 순간까지 냄새로 함께 한다. 이제 그 둘은 떼 낼 수 없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썼든 지나가는 기분으로 가볍게 썼든 낙엽과 커피는 이미 한 몸이다.
요즘 카페에 가면 수십 가지의 커피 종류가 메뉴에 적혀 있다. 나는 당뇨가 조금 있어서 무조건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아메리카노만 마셔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골라 먹는 재미가 없다. 들여다보면 사실 그 세계도 무궁무진하고, 디테일도 대단하겠지만 선택의 자유가 없는 나는 심심하다. 커피 대신 차는 어떠냐고 옆에서 묻기도 한다. 나는 아직 차 맛을 모르고, 그 세계도 모른다. 잘 몰라서 찻집을 덜 선호한다. 모르면 제 손 안에 보물을 쥐어줘도 그냥 버리고 만다.
황산 여행 중이었다. 어딜 가나 뜨거운 차를 주었다. 그런데 며칠을 차만 마시니 속이 적응을 못했다. 무언가 상실감마저 느껴졌다. 당연히 있을 줄 알고 커피를 챙겨올 생각을 못했는데 황당했다. 황산을 중간 쯤 올랐는데, 커피 생각이 너무 간절했다. 그때였다. 앗! 저건! 커피다! 중간 지점쯤에서 장사치가 우리나라 믹스 커피를 팔고 있었다. 낱개 한 포를 거의 다섯 배 정도에 팔았지만, 나는 무조건 샀다. 원래의 가격을 알기에 겨우 3개를 샀고, 우리들은 그걸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최고의 감로수. 많은 연구가들이 커피 맛의 적정선을 찾아내어 만들었다는 그 맛. 순간 세계 최고라고 말하고 싶었다.
파리 여행 중 컨디션이 나빠져 누워 있다가, 좋은 소식을 문자로 받았다. 나는 힘이 번쩍 났고, 우리나라 믹스 커피를 찾아 타 마셨다. 그 진하고 달콤한 맛이라니! 타국에서 고향을 느끼게 해 주는 존재였다. 그 한 봉지가…. 옷을 챙겨 입고 나섰다. 그 날 하루의 시작은 커피의 달콤 쌉싸름함으로부터였다. 커피의 위대한 힘이라면 과대포장이겠지만, 사실 그랬다. 때론 커피와 담배처럼 작은 것들이 사람을 위로하고, 그 위로로 앞으로 나아간다.
설사 몸에는 조금 나쁘다고 해도 정신이 충족되니 꼭 내칠 일만은 아니다. 눈 뜨자마자 목을 축이며 하루를 시작하는 첫걸음이고, 글이 안 써질 때는 잔 안에 생각을 모으게 해 주는 존재이고, 만나서 이야기 할 때 서로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이다. 커피는 우리들의 시간 속에서 함께한다. 게다가 낙엽 타는 냄새를 덤으로 주는데, 멋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