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부서지는 소리
유숙자
자카란다의 계절이다. 온 동네가 보랏빛 꽃 잔치로 한창이다. 잔잔한 미풍에도 꽃잎이 흔들린다. 바람이 일지 않아도 꽃잎을 날린다. 느지막이 피어났으니 천천히 져도 좋으련만 왜 그리 서두르며 떨어지는지 모를 일이다. 보도에 보랏빛 융단을 풍성하게 깔아 주어 낙화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럽다. 차마 애처로워 밟고 지날 수 없는 싱싱한 꽃잎. 사방 어딜 봐도 신비의 색깔로 물든 이 계절을 나는 좋아한다. 어느 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으랴마는 유독 이 보랏빛 꽃으로 유월이 마냥 싱그럽다.
자카란다가 피기 시작하면 먼 기억 속 두고 온 옛집의 등나무가 떠오른다. 담 한 면을 다 차지할 정도로 길고 멋진 그늘을 만들어 주던 등나무. 뭐가 마땅찮은지 줄기를 서로 감고 꼬아가며 올려도 꽃만큼은 화사하게 피워낸다. 외지에 나와 산 지 3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 그 정원이 눈에 어려 보랏빛 향수에 잠길 때가 있다. 그때 우리 집은 등꽃뿐만 아니라 보라색 꽃이 많았다. 봄이면 무더기로 피어오르던 난초가 청초했고 때에 맞춰 라일락이 한창이었다. 라일락이 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피기 시작하는 등꽃으로 온 집안이 보랏빛 물결로 출렁였다.
등꽃 그늘에 있으면 이파리의 푸름이, 은은한 꽃 내음이 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영혼이 맑아지는 것 같다. 무성한 잎 사이로 분사되는 빛의 흩어짐도 장관이다.
등꽃이 지고 꽃자리 여물면 긴 완두콩 모양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다. 바람이 엮어 내는 정담과 천둥소리에 놀라며 튼실하게 익어간 열매, 마치 사열식이라도 하는 듯 쭉쭉 뻗어 보기 좋다. 이윽고 이파리들이 가을빛에 익어 흔들리며 비벼지며, 멀어져간 여름의 소리를 연주할 즈음이면 등나무 열매는 끝 간데없이 높아진 하늘에 매달려 춤을 춘다.
겨울, 혹독한 추위가 살 속을 파고들 때 등나무 열매는 아픔처럼 터진다.
“탁, 데구루루-.”
여름 한 철 그지없이 맑은 햇살과 뜨겁던 불의 그림자를 여물렸던 가을이 고독이 무엇인지 알고 내는 파열음이다. 온갖 소리를 흡수해 버린 적막한 밤, 등나무 열매 터지는 소리에 잠이 오지 않았는지 잠이 오지 않아 들렸는지 알 수 없으나 탁탁 연 달은 비명이 불면의 밤을 흔들어 놓았다. 그 소리는 시간이 부서지는 푸르고 투명한 절규다. 남편이 부재중인 집에서 어린 두 아들 데리고 말 없는 생각 속에 떨며 지낸 세월이다.
등나무 집은 마당이 무척 넓었다. 그 공간에 질서 없이 나무를 많이 심어 놓아 밤이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해 여름 어스름 무렵, 마당에서 숨바꼭질했다. 장난기 많은 큰 녀석이 언제나 엄마를 골탕 먹이려 술래를 시켰다. 날이 차츰 어두워지니 나무들이 검은 물체처럼 보였다. 저만치 웅크리고 앉아 있는 큰아들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언제 저렇게 컸을까. 등이 펑퍼짐한 게 어른스러웠다.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아들을 꽉 끌어안았다.
‘요놈, 잡았다.’ 금방 내 눈에 띈 게 의기양양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읔 소리가 나며 큰아들인 줄 알고 끌어안은 사람이 양팔을 뒤로 힘껏 제쳤다. 그 힘이 어찌나 셌던지 그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소리에 놀라 아이들이 달려왔을 때 내가 끌어안았던 사람이 재빨리 쓰레기통을 밟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 아들인 줄 알고 끌어 앉았던 사람은 도둑이었다. 초저녁부터 들어와 날이 어둡기 기다리며 나무처럼 웅크리고 앉았다가 부지불식간에 ‘요놈 잡았다’를 외쳤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바로 눈앞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당을 휘젓고 다녔으니 들킬까 봐 꼼짝도 못 하고 간이 오그라들었을 텐데, 혼비백산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때 아이들의 우주였던 나는 지금의 내 아들보다 어린 30대 후반이었다. 창문마다, 방문마다, 잠을 쇠를 줄줄이 달아 놓아도 불안했으나 두 아들을 양옆에 누이고 나면 천군만마가 곁을 지켜 주는 것처럼 든든했다. 무서움 잘 타는 내가 그 세월을 살아 낼 수 있었던 것은 튼실하게 잘 자라준 두 아들 덕분이었다. 아이들이 열한 살, 아홉 살이었다.
바람도 없는데 여전히 자카란다 꽃비가 내리고 있다. 왜 싱싱한 채로 서둘러 떨어지고 있는지. 30여 년 전에도 눈송이처럼 내리던 등꽃을 안타깝게 바라보지 않았던가. 누가 그 아름다움에 낙화란 말을 할 수 있을까. 흩날리며 떨어지는 자카란다도 등꽃도 지기 위해 피는 것 같아 애처롭다.
계절이 바뀌면 어김없이 새롭게 피어나는 꽃. 꽃물결 너머로 사라져간 세월. 내 생애의 여름, 메마르고 허기진 감성을 푸른 그늘로, 보랏빛 꽃으로 보듬어 주던 그 여름을 사랑한다.
꽃을 줍는다.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기억을 줍는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