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말 / 강천

 

 

내내 잊지 못해서 다시 찾은 자작나무 숲이다. 봄날의 숲은 겨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월 숲이 흑백 대비의 단조로움이었다면, 오월의 숲은 꿈을 품은 듯 연연하다.

미끈하게 뻗어 오른 자작나무 우듬지 끝에서 춤추는 여린 잎들이 생기발랄하다. 마파람 따라 하늘하늘 몸을 뒤집어가면서 봄 햇살을 즐긴다. 숲은 여리여리한 이파리들의 재잘거림으로 수선스럽다. 나무들 사이사이로 떠도는 내음에 푸릇한 향이 배었다. 밀림 속으로 아른아른 쏟아져 들어오는 부챗살빛에도 싱그러운 연록이 스몄다. 하얀 몸통에 새겨진 검은 상흔, 그 명암조차도 생동의 한 부분인 양 신록에 녹아들었다. 바람도, 소리도, 향기도, 오월의 자작나무 숲은 연두로 가득 차 있다.

나무숲이 내어주는 초록빛 공기를 한껏 머금어본다. 나도 모르게 절로 들이쉬게 되는 큰 숨이다. 그만큼 세간의 삶이 고달팠다는 것일까. 그만큼 풋풋하게 피어나는 활력이 그리웠다는 뜻일까. 몸속을 한가득 숲의 기운으로 채우고, 겉을 상큼한 바람으로 휘감은 나는 이제 수풀의 일부가 되었다. 나도 이들과 같은 숲의 일원이다. 무릇 구성원이 되려면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 법. 곁에 있는 동무들이 하는 양을 보아하니 너나 할 것 없이 가지를 위쪽으로 쭉쭉 내뻗고 있다.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흡사한 모양새다.

나도 나무들처럼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가슴이 활짝 열리고 고개가 자연스레 뒤로 젖혀진다. 이파리로 뒤덮인 틈 사이로 설핏설핏 하늘이 열린다. 아, 이제야 알겠다. 왜 이들이 한결같이 하늘바라기만 하고 있는지. 나무들은 지금 자신들의 귀착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닌, 그 너머 광대무변한 우주의 필연을. 자작나무가 이리도 올곧은 것은 오로지 저 허공을 향하여 온 힘을 다해서가 아닐까. 한 곳만 바라보며 나아가기에 흐트러짐 없이 반듯할 수 있는 모양이다. 땅 위에서의 무질서가 목표를 향하면서 가지런함으로 바뀌어 가는가 보다. ‘만물은 멈추지 않고 부단히 변하여 스스로 그렇게 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러 다잡지 않아도 절로 이루어지는 무위의 질서다.

눈길이 아득하게 치솟은 우듬지 끝을 따라간다. 그지없이 넓은 공간이지만 그들이 안내하는 곳은 태초의 한 점으로 귀결된다.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는 원점이자 소실점이다. 내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마지막이고 나무들의 염원지이다. ‘여기 숲에서는 세상을 거꾸로 보아야 한다’며 지나가던 바람이 귀엣말로 넌지시 일러준다. 바늘구멍 같은 틈으로 올려다볼 것이 아니라, 구만리를 날아오른 대붕처럼 까마득한 소점에서 굽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장대히 솟아오른 나무도, 빼곡하게 들어찬 삼림도 그 원천에서 보면 그저 하나의 푸른 점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높다란 산도, 아웅다웅 다툼하는 인간 세상도 지구라는 둥근 구슬을 이루는 부속에 지나지 않을 터다. 신들의 영역인 달도, 해도 그저 반짝이는 별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는 못할 터.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저것이 드러내 보이지 않더라도 이것을 통하여 보면 곧 저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 말미암게 된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이런, 저런 것을 자연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기 나름이라지 않은가. 작은 것에 비유하면 한없이 크게 되고 큰 견지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하잘것없이 작게 된다. 사물의 가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으로 달라진다는 말이다. 내가 인간이라고 으스대며 숲의 나무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하지만, 겨우 밑동에나 매달린 처지이듯이.

나는 지금 하늘을 향해 나란히 늘어선 오월의 자작나무들 사이에 서 있다. 이들이 닿고자 하는 지향점과 내가 바라는 도달점은 서로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들은 제 몸통의 가지를 잘라가면서 ‘스스로 그렇게 되는 법을 안다’는 것이다. 치오를 생각만 하지 정작 내려 보지 못하는 나는 아직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굽은 등을 바르게 펼 용기가 없다. 일 걱정, 돈 걱정, 하다못해 눈앞의 개미가 기어 다니다가 엎어질까 하는 부질없는 걱정까지. 말은 나무들과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하면서 심중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한 나. 이것이 범부의 숙명으로 굳어져 버릴까 두렵다.

만사는 상대적이라 했다. 현실이 못나 보여도 더 한 것에 비하면 오히려 괜찮은 삶일 수도 있겠다고 자위하며 바늘귀만큼 트인 하늘을 치어다본다. 넓은 흉금으로 내려다보라던 바람의 말은 그사이에 또 길을 잃었다.

<좋은수필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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