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길에서 옛날처럼 소를 몰아 쟁기질하는 광경을 보았다. 아침 일찍 시작했는지 이른 시간인데도 마른 논 두 이랑을 갈아엎고 세 번째 이랑에 접어들고 있었다. 곁에 서서 바라보니 쌓인 두둑이 정연한데, 물기가 축축하다.
"이랴, 이랴"
부리는 소가 힘이 넘치는데도 농부는 연이어 다그친다. 그러니까 부리망을 쓴 소는 목을 길게 빼고 눈을 크게 한번 희번덕거리더니 '이래도 내가 더딘 거야' 하는 듯 잰걸음을 옮긴다. 그러니까 몸에 매달린 쟁기의 속도도 빨라지며 상쾌한 마찰음을 내고, 보습 날에 떠 담긴 흙이 볏을 통해 위로 치솟으면서 고꾸라져 뒤집힌다. 그런 쟁깃밥이 아주 볼만하다. 이 정도의 솜씨라면 소도 농부도 상머슴이지 싶다.
옛 사람들은 머슴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쟁기질과 이엉 얹기, 멍석 만들기를 꼽았다. 물론, 힘이 바탕이 돼야 하므로 더러 돌을 들어 올리기로 체력 측정도 했지만, 힘센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보다는 일의 선후를 가릴 줄 아는지, 천기와 지기를 살필 줄 아는지 등의 능력이 중시되었다. 농촌에 살면서도 몸이 약해 일을 못하시는 아버지는 장차 집안 농사를 내가 맡아 짓기를 바라셨다. 당신 슬하에 아들 셋이 있었으나, 장남은 장사합네 하고 외지로 나돌고 막내는 어린 데다 머리가 좋아 농촌에 썩히기는 아깝고, 그러니 성격 무던한 나를 지목하신 것이다.
아무튼 형편이 그리되어 나는 어려서부터 재벌2세가 부모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경영수업을 쌓듯, 일을 배워 나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망태를 매고 산에 올라 솔방울을 줍거나, 마른나무 등걸을 주어 날랐으며, 고학년이 돼서는 소에게 먹일 꼴을 한 망태씩 해 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커서는 일요일이나 방학 때가 되면 머슴과 똑같이 들일을 하였다.
그런데, 워낙에 태생이 굼뜬 데다 왼손잡이인 나는 집에 있는 낫들이 하나같이 손에 익지를 않아 손가락을 베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지게 또한 등에 붙지 않아 힘은 있는데도, 남들처럼 많이 져 나르지를 못했다.
그런 중에도 견습은 계속되었다.. 그 대표적인 게 쟁기질이다. 갈이 일은 자고로 시어미가 주권 넘기기 꺼리듯 젊은이에게 전수는 금기인데, 나는 아버지의 기대와 관심으로 하여 일찍이 실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부리는 사람이 시원찮아 그런지 소가 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서툰 기수를 말이 거부하듯 손잡이를 바투 잡았는데도 바르게 가지를 않고 물 주릿대를 벗어나 버리거나, 뒷발질을 해대며 심하게 반항을 하였다.
그래서 누군가가 옆에서 코뚜리를 잡아 주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보습날을 조금만 숙여도 여지없이 땅에 박혀 버리고, 반대로 이번에는 조금 치켜들면 썰매처럼 땅바닥을 스르르 스치고 내달아 버리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쟁기에만 신경을 쓰는가, 눈은 항상 전방 10m10m 정도를 주시하고서 장애물이 있는지, 간격은 맞는지, 어디만치서 끝나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 그러면서 갈리는 소리도 소홀히 들어 넘길 수가 없다. 암석에라도 부딪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정만 잘 되면 쟁기질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었다. 일에 몰두하다보면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가고, 갈아엎은 작업량이 하루의 성과를 그대로 보여주어서 뿌듯했다. 쟁기질은 마른 땅 일도 묘미가 있지만, 무논에서의 쟁기질은 한층 별스런 맛이 있었다. 소가 앞정강이로 힘차게 물을 차면서 앞으로 나아갈 때 속살 뒤집어 놓은 그 지반 위를 밟고 지나가는 기분은 개척자의 기분이다. 뒤이어 폭포수 쏟아지듯 그 속으로 밀려드는 물의 동요, 그것은 하나의 활력이었다.
나는 그렇게 수많은 실수를 하면서 쟁기질을 익혔다. 그 동안 조작 미숙으로 장애물에 받혀서 파손한 보습만도 두어 개가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번도 꾸중을 않으셨다. 이유는 아마도 힘든 농사일을 거역 않고 따라 배우려는 태도를 가상히 여긴 점도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나의 부조로 인해 걸핏하면 꾀를 부려 골탕을 먹이는 머슴에 대하여 견제하는 성과를 거둔 때문일 수도 있다.
머슴은 그렇게 애를 먹이고 속을 썩였는데.. 아버지는 머슴이 파장 내는 날이면 보란 듯이 그만큼의 밀린 일을 해 놓도록 하여 그를 무안하게 만들어 놓곤 했다.
당시 집에서는 두 마리의 소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중 한 마리의 소가 고삐를 풀고 나와 멍석에 펼쳐놓은 보리를 먹고 고창증으로 죽은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면사무소에서는 소를 부검도 하지 않고 무조건 땅에 매장하라 했다. 병명을 알 수 없으니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바람에 집에서는 한 푼의 돈도 건지질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다 나머지 한 마리 소마저도 얼마 있다가 아버지가 입원을 하시는 바람에 병원비 충당으로 팔아 없애고 말았다.
그 아픈 사연을 안고있는 그 시절 사용하던 쟁기가 지금도 시골집 허청 담 벽에 수 십 년째 댕그마니 매달려 있다. 그리고 한편, 그토록 농부가 되어 고향 땅을 지켜주길 바라던 나도 그후 집을 박차고 도회로 나와 버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은 쟁기질을 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이 우울하고 가슴이 답답할 때 생각이 나는데, 그렇게 소를 몰고 나가 한바탕 쟁기질을 하노라면 왠지 가슴이 탁 트이고 거뜬해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농부도 아니 되었고,다른 일에 성공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지하에서 일을 조련시킨 자식이 당신의 소원대로 농사꾼이 되신 것으로 알고 계실까. 이 불효 막급 하기 짝이 없는 자식은 당신이 물러주신 논마저도 이런저런 이유로 없애고 말았으니 얼굴을 들 면목조차 없다.
등산길에서 논갈이하는 소를 보고 한식경이나 눈을 떼지 못한 건 혹여 당신이 물려주신 전답을 지키지 못한 불효의 가책 때문은 아니었는지….